시대를 뛰어넘은 작가적 성찰ㆍ표현 - 故 김기영 감독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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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5-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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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작 하녀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결코 어우러질 수 없는 반목을 통해 이들의 도발과 파격, 갈등을 서스펜스라는 영화적 장르로 표현했다. 이로인해 근대화 시기의 과도기적 성향, 즉 중산층으로의 열망과 여성의 신분상승 욕망ㆍ좌절 등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아주경제 인동민 기자)

“‘하녀’시리즈에 시골 출신의 젊은 여자들이 나오는 건 1960~70년대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아주 당연한 모습이었다. 근대화 정책으로 여자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와서 버스 안내양이나 하녀로 일했다. 당시에는 가정부가 있는 중산층 집안에서 치정사건도 일어나곤 했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나의 작품들은 주로 중산층 가정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하녀'를 만들었다. 모극장 사장에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故 김기영 감독

故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서고 있다. 리메이크작인 임상수 감독의 2010년판 ‘하녀’ 때문이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가진 원작의 파워와 아우라가 5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함을 증명하려는 듯 리메이크 하녀는 전도연·이정재·윤여정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한 것도 모자라 제63회 칸 국제영화제 공식경쟁부문에 출품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개봉 1주 만에 전국 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해 영화를 본 관객이든 보지 않은 관객이든 원작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CGV는 원작 하녀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오는 6월 3일 CGV 대학로ㆍ강변ㆍ서면ㆍ롯데 건대입구ㆍ대한극장 등 5개 극장에서 재개봉을 확정했다.

1960년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그 해 22만 관객 동원으로 최고 흥행작이 된 ‘하녀’는 故 김기영 감독 작품의 모태와도 같다.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노동자, 중산층 대열에 합류하고픈 가장 등 근대화가 진행 중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캐릭터들, 복층 구조의 현대식 가옥 내부에서 벌어지는 밀실 공포라는 독특한 공간 설정, 보는 이의 신경을 자극하는 서스펜스 구조 등은 영화를 차별화된, 보다 세련된 작품으로 올려놓았다.
이후 ‘화녀’ ‘화녀82’ ‘충녀’ ‘육식동물’ 등 리메이크를 거듭하면서 1960년 하녀에서 보여준 시대를 뛰어넘는 작가적인 성찰과 표현은 진화와 함께 맥을 이어갔다.

1990년대 말부터 김 감독의 작품들은 ‘가치의 재발견’을 통해 세계 영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하녀는 그의 대표작답게 프랑스 최고 권위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장 미셸 프로동 편집장과 ‘성난 황소’ ‘에비에이터’ ‘디파티드’ 등을 만든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 등의 찬사를 받으며 매니아의 영화에서 세계 영화팬들의 영화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10년 국내 영화계는 50년 시간을 지나오며 위대한 작품의 표본이 된 하녀의 예술성과 존재감에 압도됐다. 임상수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리메이크 작 ‘하녀’가 등장한 것처럼 동시대 국내외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 배우 그리고 관객 조차 50년전 이 기이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의 고전영화들은 일찌감치 보존 가치를 인정받으며 안정적으로 보관된다. 그에 비해 국내 영화계는 뒤늦게 고전영화의 보존과 복원을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미국의 스콜세지 감독은 자신이 운영하는 세계영화재단(WCFㆍWorld Cinema Foundation)을 통해 김 감독의 하녀를 첫 번째 디지털 프로젝트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디지털 복원 지원 사업이 제3 세계 영화에만 국한된다는 세계영화제단의 기본방침과 다른 것으로 당시 스콜세지는 “하녀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으로 이영화의 지원을 결정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당시 하녀의 필름 상태는 불안정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린트를 합쳐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이 된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negative film)은 1982년 5권과 8권, 두 대의 릴이 사라진 상태로 발견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90년 영어자막이 들어간 또 다른 프린트를 찾아내 소실된 두 릴을 채워 일단 하나의 프린트로 완성됐다.

하지만 영문자막은 손으로 휘갈겨 쓴 것이었고, 어떤 장면에서는 자막이 화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해 영화 몰입이 불가능할 정도 였다. 먼지와 티끌, 스크래치를 제거하는 것 외에도 자막제거작업은 유례가 없었기 때문에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영상자료원은 자막복원솔루션 ‘MJW 1.0’을 개발, 자막을 말끔히 제거하고 자국이 남거나 윤곽선이 깨지는 부작용까지도 없앨 수 있었다.

이처럼 정상적인 상영이 불가능했던 하녀는 그 가치를 알아본 스콜세지 감독의 지원과 한국영상자료원의 협조로 깨끗하고 안정적인 화면으로 관객들과 다시 만나게 됐다.

근대화를 시작한 1960년의 한국에서 여공ㆍ하녀ㆍ맞벌이 주부ㆍ생계형 예술가로 대표된 하녀의 영화 속 캐릭터는 새로 지어진 2층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충돌하고 공생하게 된다. 김 감독은 이 한정된 공간 속에서 결코 어우러질 수 없는 반목을 통해 이들의 도발과 파격, 갈등을 서스펜스라는 영화적 장르로 표현했다. 근대화 시기의 과도기적 성향, 즉 중산층으로의 열망과 여성의 신분상승 욕망ㆍ좌절 등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하녀 속 캐릭터들은 도덕성보다 개인의 욕망에 초점이 맞춰져 출연진도 연기파 배우 김진규, 주증녀 그리고 신예 이음심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주를 이뤘다.
김진규는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걸작 ‘오발탄’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에 출연한 당대 최고의 배우다. 그는 하녀에서 하룻밤 외도로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는 남자의 억울함과 자신의 가정을 중산층으로 격상시키는 집요한 욕망까지 복합적으로 담아내는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의 핵심인 ‘하녀’ 역의 이은심은 악녀의 잔인한 본성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파격적인 연기로 하녀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이 밖에도 400여 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한 국내 대표 여배우 중 한 사람인 주증녀가 ‘동식 부인’ 역으로 등장해 한국고전여인상의 표본을 보여줬다.

또 신성일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려 이목을 집중시킨 인기 여배우 엄앵란도 출연해 맹랑한 젊음을 연기한다. 특히 지금은 국민배우로 존경 받는 안성기의 8살 아역배우 시절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하녀가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영화를 가득 채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미장센은 전적으로 김 감독의 예술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학도였지만 어려서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세상의 축소판’이란 생각으로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2층집 세트를 만들었고, 직접 가구와 소품까지 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조명에도 관심을 기울여 현재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될 기괴함을 창조해냈다.

시대를 앞선 세련된 연출은 그의 신화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돼 스콜세지ㆍ박찬욱ㆍ봉준호ㆍ임상수 등 현존하는 국내외 최고감독들과 평론가들은 그를 천재 감독으로 부르는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원작 하녀의 재개봉은 그런 김 감독의 거대한 재능을 일반 관객이 확인하고 되새기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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