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회장 취임 이후 23년, 2년여의 공백기간을 제외한다고 해도 2010년 현재 20년이 넘는 오랜 기간동안 이건희는 삼성의 수장 역할을 맡아왔다. 강산이 두번도 넘게 변하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삼성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을 세계 속의 삼성으로 이끈 것도 그의 공이 컸다. 그리고 그는 중요한 고비마다 '정치 4류론', '강소국론', '천재론', '창조경영론', '샌드위치론' 등 화두를 던지며 한국 사회와 경제계의 각성과 발전을 촉구했다. 아울러 IOC 위원을 맡아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한단계 더 높였다. 회사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개혁을 촉구하근 한편, 때로는 파격적인 조직개편과 인사 등을 통해 삼성의 진화를 이끌어왔다.
이처럼 활발한 행보를 계속해온 그이지만 1973년 그룹 후계자로 지명된 후 회장 취임까지 15년에 달하는 오랜 기간동안은 이렇다 할 활동을 자제해왔다. 후계자로써 자신의 힘과 능력을 보여줄 기회도 많았지만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보지이 않았다. 그룹의 중요한 대부분의 회의와 행사에 참석했지만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으며 스스로도 경영에 나서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인 이병철 곁에서 묵묵히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1966년 한국비료 사건으로 이병철이 경영일선에서 은퇴하고, 후계자였던 맏형 이맹희가 실질적인 경영을 책임졌지만 당시 이맹희는 기존 경영진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그룹 경영도 엉망이 됐다. 결국 이병철 복귀 이후 이맹희는 그룹의 주요 보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이맹희는 후계자의 자리도 이건희에게 내어주게 됐다. 경영 승계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형의 실패를 이건희는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다. 아울러 경영과 관련해서는 자식에게도 냉정한 아버지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내실을 키워왔다.
하지만 이건희는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만의 고집으로 사업을 진행한 사례도 있었다.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면서도 확실하게 승산이 있는 미래 사업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반도체 사업이 꼽힌다.
이병철은 복귀 이후 전자산업 진출을 서둘렀다. 수출산업 육성을 위한 교두보 발판이 목적이었다. 아울러 부가가치가 큰 전자산업이 삼성의 발전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도 전자산업 진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건희는 이병철보다 한발 더 미래를 내다봤다. 1974년 오일쇼크로 한국반도체가 파산 직전에 이르자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반도체 인수를 통해 반도체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병철은 단호했다. 기술이 부족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반도체 사업은 부담이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이건희는 자신의 자금을 동원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는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모태가 됐다. 물론 진행과정에서 수많은 좌절을 겪었다. 적자는 계속 됐고, 기술 발전도 답보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트랜지스터 생산에 그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시간이 흐른 오늘날 메모리 반도체 부문 1위로 도약했다. 당시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에 대한 고집을 꺾었다면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영위할 수 있었을지, 아울러 반도체 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해도 지금의 위상을 갖출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자식에게도 가차없던 아버지의 밑에서 이건희가 어떤 용기로 반도체에 대한 소신을 끝까지 고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만의 경영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울러 무언가 자신만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를 가능케 했을 수도 있다. 그 동기가 어찌됐건 그의 반도체 사업은 현재 삼성 뿐 아니라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초석이 됐다.
반도체와 함께 이건희가 후계자 시절 뛰어든 대표적 사업은 석유사업이다. 이건희는 1978년 삼성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반도체 사업은 답보상태였고, 이건희는 이 기회를 발판으로 자신의 경영능력을 대내외에 확인시켜야 했다.
마침 당시 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원유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공업 국가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한국은 에너지 자원 확보가 절실했다. 이건희는 해외사업추진위원회를 통해 원유 확보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멕시코와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이들 국가와 원유 공급 계약을 맺었다. 기름 한방울이 아쉬운 당시 이건희의 원유 계약은 한국경제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의 석유사업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국영기업이었던 유공의 민영화를 앞두고 이건희는 유공 인수에 총력전을 펼쳤지만 결국 삼성은 선경(현 SK)과의 경쟁에서 패했다. 유공의 후신인 SK에너지는 2009년 현재 매출액 35조8275억원, 영업이익9078억원의 거대 정유기업으로 부상했다. 당시에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을 감안하면 인수실패는 그의 경력에도 흡집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이후 이건희는 그룹의 공식적인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은둔의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1982년 덤프트럭과의 충돌로 자신의 푸조 자동차는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도 몸이 튕겨나오면서 큰 외상은 입지 않았지만 이를 둘러싼 그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가 흘러나왔다. 사고 이후 뇌를 다쳤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마약에 손을 대 결국 중독이 됐다는 풍문도 돌았다. 후계자 경쟁에서 밀렸지만 여전히 건재한 두 형도 이건희가 경영권 승계를 받는데는 적지않은 부담이 됐다. 당시 3남이 혈들을 제치고 경영을 이어받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은 의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안팎의 부정적인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있는데 이어 자신이 처음으로 몸담았던 동양방송 역시 군사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정부에 헌납해야 했다.
결국 후계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미처 보여주지 못한 상황에서 1987년 이병철이 숨을 거둠으로써 이건희는 삼성의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는 이병철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어야 했다. 형재들과의 그룹 분할은 취임 10년후에야 매듭이 지어졌다. 이건희의 삼성에 대한 의혹의 눈길도 계속됐다. 당시 대기업마저 공중분해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군사정권과의 불화설도 고개를 들었다.
삼성을 온전한 자신의 체제로 만들기까지 그는 후계자 시절을 포함해 20년이 넘는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건희는 비로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그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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