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 31 후베이성편> 8-1. 관우의 넋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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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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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양 관릉 정문. 황제를 상징하는 금빛 황색 지붕을 붉은 담이 둘러싸고 있으니 경관이 웅장하다.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관우는 아들 관평과 맥성(麥城)을 빠져 나와 촉으로 탈출하던 중 임저(臨沮·현 후베이(胡北)성 위안안(遠安))에서 오나라 매복군에게 사로잡혀 끝내 참수당한다. 이로써 서기 219년 10월 관우는 나이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관우는 죽어서도 중국인들 사이에 무신(武神)으로 불리며‘충의’를 대변하는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

관우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 지는 그의 무덤을 보면 알 수 있다. 관우의 수급없는 시신이 묻혀있는 당양의 관우 무덤은 ‘관릉(關陵)’으로 불린다. 보통 황제의 무덤을 ‘릉(陵)’이라 부르는 데 관우의 무덤이 관릉이라 불린다는 것은 곧 관우가 황제의 예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취재진은 당양(當陽) 시내 서북쪽을 향해 차량으로 3km 가량 달려 관우의 시신이 묻혀있다는 바로 이곳 관릉에 도착했다.

황제를 상징하는 금빛 황색 지붕을 이고 붉은 장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웅장하고 빼어난 경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히 황제의 예우를 받는 영웅의 무덤다웠다.

안내원은 “총 6만4000㎡ 면적에 세워진 관릉은 역대 황제의 릉처럼 중간에 곧게 뻗은 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적인 구조를 갖췄다”며 “또한 4개 전각, 5개 정원, 총 9겹으로 이뤄진 중국 내 최고의 격식을 갖춘 황릉에 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처음부터 관릉이 이처럼 황제 무덤의 격식을 갖춘 것은 아니다. 처음 관우의 시신만 묻혀있던 이곳은 수·당나라 때에 이르러 점점 확충돼 16세기 명나라 가정황제 때 황릉과 동격인 관릉으로 칭해지며 지금의 구조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총 18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관릉이 중국 삼국지 문화의 대표적인 성지로 불릴 만도 하다.

신도비정. 비석에는 역대 황제들이 관우에게 하사한 칭호가 빼곡히 적혀있다. 총 16명의 황제가 23차례에 걸쳐 그에게 작호를 내렸다 전해진다.


관릉 입구를 지나니 가장 먼저 ‘신도비정(神道碑亭)’이 눈에 띈다. 역대 황제들이 관우에게 하사한 칭호가 적혀있다. 총 16명의 황제가 23차례에 걸쳐 그에게 작호를 내렸다 전해진다.

정자 양 기둥에는 청나라 동치황제가 하사한 대련도 함께 새겨져 있다. ‘灘水夜號蛟龍飮泣三分恨’ (관우가 죽으니 강물이 통곡하고 물 속의 용도 천하가 위촉오 삼국으로 나뉜 것을 슬퍼한다) ‘秋山晝嘯草木聲誅兩賊冤’ (관우가 죽으니 산이 포효하고 초목이 관우를 죽인 두 명의 원수를(조조와 손권을 가리킴) 규탄한다)는 뜻이다. 역대 황제들의 관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전에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관우의 애마 적토마상이 있다.


삼원문(三元門)을 지나 마전(馬殿)에 가니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의 말 적토마가 눈에 띈다. 수 없는 전쟁터에서 관우와 혁혁한 공을 세운 적토마. 관우가 죽은 뒤 식음을 전폐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지니 적토마 역시 주군에 대한 충심이 관우 못지 않았으리 싶다.

역대 황제들이 관우를 참배하던 배전. 전각 양 옆 기둥에 관우의 충의를 찬양하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배전(拜殿)은 역대 황제들이 관우를 참배하던 곳이다. 전각 양 옆 기둥에 역시 관우의 충의를 찬양하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독특하게 ‘州’자 5개와 ‘德’자 5개를 넣어 만든 게 인상 깊다.

‘生蒲州長解州戰徐州鎭荆州万古神州有赫’(푸저우에서 태어나 셰저우에서 자라고, 쉬저우에서 적군과 싸우고 징저우를 지키니 그 이름이 천하에 길이 기억되리라) ‘兄玄德弟翼德擒龐德釋孟德千秋志德无雙’ (현덕(유비)을 형으로 익덕(장비)을 아우로 삼고, 방덕의 목을 베고 맹덕(조조)을 놓아주니 관우의 그 덕심은 천추에 영원하리라)라는 뜻이다.

정전에 걸려진 '위진화하' 편액. 청나라 동치황제가 17세 때 쓴 친필이라 전해진다.


배전을 지나 정전(正殿)에 들어서니 청나라 동치황제가 17세 젊은 나이에 친필로 썼다는 ‘위진화하(威震華夏)’ 편액이 눈에 띈다. ‘그 위세가 대단해 천하를 흔든다’는 뜻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백성들이 이 편액을 떼내 집에 가져다가 책상으로 사용하다가 80년대 초에야 비로소 찾아내 다시 원위치에 걸어놓았다 전해진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편액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전 안에 모셔진 관우(맨앞).주창(좌).관평상. 봉황의 눈을 부릅뜨고 두 눈썹을 바짝 치켜세우고 앉아있는 관우의 모습은 전신(戰神)을 방불케 한다.


정전 안에는 거대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봉황의 눈을 부릅뜨고 두 눈썹을 바짝 치켜세우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전신(戰神)을 방불케 한다.

관우의 좌우 양 옆에는 각각 청룡언월도를 비껴 든 주창과 투구를 두 손으로 바치고 있는 관평이 서 있다. 아버지와 죽음을 함께 한 관우의 양자 관평, 그리고 관우를 따라 죽었다는 아들과 다름없었던 부하 주창, 이들 ‘세 부자(父子)’의 충심과 의리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침전에 모셔진 중국 최대 관우상. 높이 3.6m에 무게가 800kg에 달한다.


정전 뒤편의 침전(寢殿)에는 약 3.6m 가량 높이에 무게 800kg의 거대한 관우 상이 모셔져 있다. 전국에 산재한 관우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전해진다. 관우를 존경하는 한 대만인이 90년대 이곳 관릉을 찾았다가 무려 1만 달러를 기부해 만든 동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지나 우리 삼국지 취재진은 관우의 시신이 실제 묻혀있는 무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관우의 머리 없는 시신만이 묻혀있다. 관우의 수급은 손권이 나무상자에 담아 조조에게 보낸 까닭에 현재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관림(關林)에 묻혀있다. 관우 역시 장비처럼 죽어서 몸과 머리가 따로 묻히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관릉 가장 안쪽에 모셔놓은 관우의 무덤. 주변의 고목들이 다 가지끝이 말라 죽어있는 게 인상적이다.


높이 7m에 직경 10m, 둘레 70m에 달하는 관우의 무덤은 생각만큼 거대하지는 않은 듯싶다. 무덤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가뜩이나 겨울철 칼 바람이 몰아치는데 무덤 주위에 검은 실루엣의 고목까지 우거져 있어 더욱더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덤 주위 나무마다 가지 끝이 말라서 죽어버린 듯 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덤 주위 나무마다 가지 끝이 말라서 죽어버린 듯 보인다. 마치 ‘머리 없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드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안내원은 “이곳의 고목들은 이상하게 일정 이상 자란 뒤에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죽어버리다”며 “어찌 보면 수급 없는 관우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는 것과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기이한 자연적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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