常山有虎將 智勇匹關張 (상산유호장 지용필관장)
漢水功勳在 當陽姓字彰 (한수공훈재 당양성자창)
兩番扶幼主 一念答先皇 (양번부유주 일념답선황)
靑史書忠烈 應流百世芳 (청사서충렬 응류백세방)
상산 땅에 호랑이 같은 장수가 있으니, 용맹과 지혜가 관우 장비와 견줄만하다.
한수에서 공훈을 이루고 당양에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이나 어린 주인을 구하고 한 마음으로 선주께 보답하니,
그 충렬함은 역사에 길이 기록돼 후대에까지 영원할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상산 조자룡의 용맹무쌍함과 충심을 노래한 부분이다. 나관중은 이 소설에서 조자룡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물로 묘사했다. 충심은 깊으나 자만한 관우, 용감하지만 경솔한 장비와 달리 조자룡은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영웅상의 표본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적 사상에 의해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다른 인물과 달리 조자룡은 만인이 흠모하고 동경하는 중국인의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생전에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아 백전불패의 용장이라 불리는 상산 조자룡의 매력을 한층 더 파헤치기 위해 취재진은 조자룡이 태어난 고향인 스자좡(石家庄) 정딩(正定)현으로 향했다.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 시내에서 북쪽으로 15㎞ 되는 지점에 자리한 정딩현. 이곳은 약 2,000년 전부터 군사 요새로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본래는 ‘백성들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한다.(眞正安定)’라는 뜻에서 ‘진정(眞定)’이라 불렸다. 그러나 청나라 때 옹정제가 즉위할 당시 황제의 이름인 ‘윤진(胤禛)’과 같은 발음인 ‘진(眞)’의 사용이 금지되면서 정딩(正定)으로 불리게 됐다.
예부터 군사 요새였던 탓에 정딩현 곳곳에는 아직도 낡은 성벽이나 터가 남아 있다. 정딩현 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에 올라가니 정딩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양링차오(楊玲巧) 조자룡 사당 관리처 주임은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바로 이 남문 밖 서쪽 저기 어딘가에 조자룡의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라며 “현재 정확한 고증을 마치고 재건 준비 중에 있다”라고 설명했다. 취재진도 생가가 있었다는 곳에 가 보았지만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성문 아래로 내려오니 정딩현 출신의 수많은 학자, 장군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조자룡 동상이다. 짙은 눈썹의 영특한 눈매, 그리고 늠름한 얼굴은 오늘날 미남이라 손꼽히는 어떤 배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딩현 곳곳에서는 ‘자룡’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앞의 자룡대교, 자룡초등학교, 조자룡 대주점, 자룡광장, 조운(趙雲)로에 이르기까지 조자룡은 마치 이곳 주민들과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듯하다.
만날 때마다 “조자룡이 자랑스럽다”, “조자룡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물이다” 등등의 말을 꺼내는 이곳 주민들의 조자룡을 향한 존경심과 우러름, 그리고 자부심이 취재진에게까지 전달됐다. 오죽하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조차 지난 1958년 당시 정딩현 양차이쿠이(楊才魁) 당서기를 만나 “정딩은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조자룡이 태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건넸을까.
이곳에는 조자룡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상산전고(常山戰鼓)’라는 특별한 민속 공연도 전해져 내려온다. 상산전고는 조자룡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승전을 기념하고, 또 전장에서는 사기를 북돋고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져 유래된 전통 민속 공연이다. 상산전고 전수자인 줘젠화(左建華)씨는 “조자룡은 전쟁 때 북을 쳐서 군의 사기를 북돋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라며 “후대 사람들은 조자룡이 전쟁터에서 백전백승을 한 이유로 상산전고를 꼽는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딩현에서 어린 아이들은 4~5세 때 상산전고를 저절로 배운다. 심지어 태교 음악으로 상산전고를 들려줄 정도다.
정딩현 삼국지 관광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조자룡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조운묘(趙雲廟), 조자룡 사당이다. 조자룡 사당 앞에는 과거 장판파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뛰어들었던 조자룡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서늘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 주군의 아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창 하나 들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든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와 깊은 충심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이곳 조운묘는 지난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총 400만 위안을 투자해 청 도광제 때 세운 조운묘터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8000㎡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사당은 모두 청나라 때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떠 재건했다.
역사 속 기록에서만 총 네 차례에 걸쳐 조자룡의 사당이 건설된 바 있다고 하니 현대인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도 조자룡에 대한 숭배는 지금 못지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당 내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사의전(四義殿)’이 눈에 들어온다. 줘저우에서 방문했던 삼의궁이 삼국지의 명장면 ‘도원결의’의 세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를 모셔 놓은 사당이라면 이곳은 여기에 조자룡까지 포함해 모두 네 영웅을 모신 곳이다.
실제로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라고 서술했다. 조자룡이 유비로부터 관우와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 주고 항상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충직한 신하를 어찌 피붙이같이 여기지 않으랴.
사의전 안에는 유비가 가운데 앉아 있고, 뒤편에 관우와 장비가, 그리고 바로 옆에 조자룡이 서 있다. 유비 바로 옆에 관우나 장비가 아닌 조자룡이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만큼은 조자룡이 삼국지 역사 속 ‘화려한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으로 거듭난 듯하다.
이곳에는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순평후(順平候)전도 있다. 순평후는 조자룡이 대장군으로 봉해질 당시 받았던 시호다. 순평후전에 들어서자 왼편에 ‘인의(仁義)’, 오른편에 ‘상승(常勝, 항상 이기다)’이라고 써 붙인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조자룡의 깊은 의리와 충심, 그리고 그 용맹함을 네 글자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실제로 후대인들은 조자룡이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 용장이었음을 기리며 당시 그가 태어난 곳의 지명인 상산(常山)에서 뒤의 글자 하나만 바꿔 상승(常勝) 조자룡이라고 불렀다.
사당 중앙에는 조자룡이 은빛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홍색과 금색 비단을 어깨에 걸친 채 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리고 사당 벽 가득히 그려진 조자룡의 활약상을 담은 벽화가 시선을 끈다.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는 백전불패 용장의 모습, 평생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는 듬직한 신하의 모범상, 그리고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군자의 면모가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치듯 지나간다.
특히 장판파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단숨에 돌파해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 오는 조자룡의 당당하고 우렁찬 기세가 마치 벽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그 용맹함이 실로 얼마나 대단했으면 부하들이 “조자룡 장군의 몸 전체는 실로 담덩어리(一身都是膽)다.”라는 말을 했을까.
순평후전 한편에는 조자룡이 자주 사용했다는 80근(48㎏)짜리 묵직한 창 하나가 전시돼 있다. 약 2000년 전 조자룡이 사용하던 창과 실물 크기와 중량으로 제작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취재진이 직접 들어 보니 한 손은커녕 두 손으로 들어도 손이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이런 무거운 창을 한 손으로 이쑤시개 다루듯 휘둘렀다니 과연 조자룡은 중국 역사상 ‘창술’에 가장 뛰어났던 용장임이 틀림없는 듯했다.
70세 넘은 나이에도 노장으로 전쟁터를 누비다가 훗날 목욕을 하던 도중 ‘껄껄’ 웃으면서 호기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조자룡. 조자룡광장 한복판에 한 손에 든 창을 우뚝 세우고 근엄하게 서 있는 9.9m 높이의 조자룡 동상을 뒤로한 채 이곳을 떠나는데 금방이라도 그가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라고 외치며 뛰쳐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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