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기 때마다 전 정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온 기업과 기업인이 퇴출 또는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곤 했다. 보통은 루머로 치부되지만 소문이 퍼진 후 1년도 안 돼 현실이 되는 경우도 상당하다. 관련 CEO들은 오너 일가, 전문경영인을 떠나 항상 불안하다.
구시대의 잔재가 되물림돼선 안 된다는 지적은 늘 제기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 같은 상황이 여전히 되풀이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3일 채권단으로부터 STX조선해양의 대표이사 사임을 요구받은 강덕수 STX그룹 회장. 올해 초 증권·금융가에는 "STX그룹이 해체될 것이다. 오너(강 회장)도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동안 그룹의 성장과 구조조정에 있어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산업은행이 이 같은 결정을 했다는 점은 지켜볼 만한 대목이다. 산은은 강만수 전 KDB금융 회장 시절을 비롯해 그동안 STX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채권단은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우겠다는 것이 사임의 배경이라지만, 강 회장이 구조조정 세부방안에 있어 채권단과 갈등을 빚어온 것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회사를 가장 잘 아는 오너인 만큼 상황에 맞는 의견을 낸 그가 채권단에는 좋지 않게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새 정부 들어 달라진 환경에 따른 강 회장에 대한 재평가 결과도 사임 요구의 또 다른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조조정 돌입 후 '백의종군'하겠다는 그에 대해 회사를 살릴 유일한 책임자로 인정하겠다던 산은의 태도가 홍기택 회장 취임 후 4개월여 만에 180도 뒤바뀐 것은 현 정권과의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채권단 구조조정 대상에 놓인 다른 기업의 CEO들도 향후 강 회장과 같은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CEO에게 지우는 건 당연하다. 다만 자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회사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CEO를 일방적으로 퇴출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채권단의) 사임 요청이 투명하고 정당하게 이뤄졌다고 해도 단 한 번의 경영 실책으로 그동안 회사를 성장시킨 CEO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강 회장과 사정은 다르지만 정권의 변화에 따라 경영진의 부침이 심한 KT와 포스코의 CEO 교체설 또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KT와 포스코는 MB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불명예 퇴진한 전임 CEO들에 이어 각각 이석채·정준양 회장이 취임했다. 양사 모두 오래 전부터 정부 지분이 해소돼 민영화된 사기업이었으나 태생적 한계와 정부와 정치권의 '소유욕' 때문에 정권의 그늘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경영진의 변화가 심한 기업이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도 교체설이 가장 먼저 터졌다.
2009년과 마찬가지로 이 회장의 KT에서 먼저 청와대의 퇴진 요구설이 나온 데 이어 지난 3일에는 국세청의 포스코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가 실시됐는데 이는 정 회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두 회장은 줄곧 "나 이후 더 이상 외부에 의해 조직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회사의 자주적 독립에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지난 5년간의 노력과 별개로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아무리 성과를 일궈내도 윗선의 결정에 따라 교체될 수밖에 없는 두 회사의 운명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라며 "두 회사의 더 큰 성장을 위해서라도 정부와 정치권에서 경영체제를 흔드는 일은 그만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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