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에서 꿩으로
사람의 말이란
<자기가 제자 자유에게 이야기를 계속한다.>
사람의 말이란 그저 바람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뜻(혼·로고스)이 담겨져 있어야 말이라고 한다네. 말에 뜻이 들어있지 않거나 앞과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한다면 그걸 말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이 새 새끼가 막 알을 깨고 나와 우는 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다를까, 다르지 않은 것일까?
그래서 유가학파와 묵가학파 사이에 시비를 가르는 다툼이 있지.
그들은 서로를 부정하지. 한 쪽에서 ‘맞다’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하고, 한 쪽에서 ‘그르다’하면 다른 쪽에서는 ‘맞다’라고 해. 만일 그들이 ‘맞다’ 또는 ‘그르다’를 바르게 말하려면, 각자의 주관적 견해를 넘어서 있는 밝은 표준, 즉 명지(明智)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네.
저쪽 사람은 이쪽의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이쪽 사람은 이쪽 사물만을 보고 말한다네. 그런데 천지만물은 저것이 아닌 것은 없고, 또한 이것이 아닌 것도 없지. 저것과 이것은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뜻으로 ‘방생(方生)’이라고 해. 이는 서로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으면서 공생 공존한다는 뜻이야.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으며; 긍정이 있기에 부정이 있고, 부정이 있기에 긍정이 있으며; 옮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옮음이 있는 것이야.
그런 까닭에 성인은 어느 한 쪽에서만 보지 않고, 하늘에서 양쪽을 다 내려다본다네. 그래야 ‘사물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라는 도리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므로, 저것에 옳고 그름이 함께 있고, 이것에도 옮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면, 이것과 저것은 같은 하나의 개념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거야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지만, 이 둘은 상대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며 만들어지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야.
이것을 ‘도추(道樞: 도의 핵심)’라고 하지. 도추는 천지자연의 무궁한 발전변화의 핵심이라는 뜻이야. 옮음도 무한히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고, 그름도 무한히 그른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런데 권세를 부리는 사람들은 도추를 모르고 한 쪽만을 보며 자신도 모르는 말을 잘 내뱉지. 말의 진실은 미사여구에 가려지는 법이야. 이를 ‘언은우영화(言隱于榮華)’라고 해. 화려한 말을 쓰면 쓸수록 진실은 더 깊게 숨어들어가지. 그래서 이런 말 속에 들어있는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는 명지가 필요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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