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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아주경제 주진 기자 =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한 화가 이중섭.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겼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감이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이후 1930년대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학풍을 자랑했던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고, 일본의 전위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귀국해 1945년 문화학원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부산과 제주도로 피란, 그곳에서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졌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1956년 만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통영, 진주, 서울, 대구, 왜관 등지를 전전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말년에는 가족과 재회할 수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을 앓으며,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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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사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중섭은 서양회화의 기초 위에 동양의 미학을 실현시킨 화가였다.
해부학적 이해와 엄밀한 데생 실력을 연마한 기초 위에 한국 고유의 미의식을 담아내고자 했다. 서예와 같은 일필휘지의 필력이 유화의 붓 자국에 드러나고, 분청사기와 같은 겹쳐진 재료의 은은한 효과가 작품의 표면에 묻어 나온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장난스러운 해학이 있는가 하면 자유롭고 유려한 선조(線彫)의 아름다움에서 일종의 격조가 풍겨 나온다.
올해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미술관 역사상 최초로 이중섭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이중섭은 명실상부한 ‘국민작가’로 1970년대 이후 가히 ‘붐’이라고 할만큼 폭발적인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연구자들이 원작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번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은 그동안 산발적으로 보존되고 있는 이중섭의 원작을 최대한 한 자리에 모아 대중들이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중섭의 은지화 3점을 소장하고 있는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총 60개 소장처로부터 200여점의 작품, 100여점의 자료를 대여해 선보이고 있다.
<황소>, <욕지도 풍경>, <길 떠나는 가족> 등 그의 대표적인 유화 60여점 외에 드로잉, 은지화, 엽서화, 편지화, 유품 및 자료 등이 총망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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