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마지막 성화봉송주자들이 성화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홈페이지]
“스포츠 위에 정치가 있다.”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지난해 6월 24일 전북 무주군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회식 직후 우리 측 기자들과 만나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이날 “정치가 열려야 스포츠가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올림픽에 어떠한 정치적 이념도 포함되기를 거부했던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이 들으면 손사래를 쳤을 이 말은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장 위원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됐다.
그는 지난 4일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을 위해 찾은 인천국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남북 고위급 회담 했죠. 고위급 회담 했고 신년사 있었고 고위급 회담 있었죠. 딱 그대로 했죠”라며 정치가 해결되어야 스포츠가 된다는 자신의 철학을 거듭 강조했다.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킨 의도와 달리 현대 올림픽의 모습엔 정치 이슈와 상황이 짙게 스며있다.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동서 화합을 상징하는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꼽힌다.
◆일촉즉발 신(新)냉전 잠재운 서울올림픽
서울올림픽을 둘러싼 국제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년 먼저 개최된 모스크바올림픽의 상황부터 살펴봐야 한다. 1980년 옛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1979년에 시작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서독 등도 그해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문제는 반쪽올림픽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소련이 바로 다음 대회였던 LA올림픽을 겨냥해 보이콧으로 보복에 나선 것이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 쿠바 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공·반소를 내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시작된 이른바 신냉전이 올림픽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은 첩보 행위 방지를 위해 소련 및 바르샤바조약기구 가맹국 선수단 전원을 대상으로 경력 조사를 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는 “소련 선수단에 KGB 요원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나 다를 바 없었고 소련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행위였다.
소련과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는 즉각 “소련의 참가를 방해하는 미국의 올림픽 헌장 위반 행위를 단속해달라”며 IOC 긴급 이사회 개최를 요구했다.
미국은 소련의 선수단 보호 요청을 “미국인이 소련 선수를 해칠까봐 보호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소련 선수가 자유세계로 망명하지 못하도록 지켜달라는 뜻"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후에도 양측은 서로를 자극하며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그해 5월 8일 소련의 타스 통신은 “올림픽 헌장에 대한 미국의 오만한 태도, 올림픽의 이상과 전통에 대한 조롱은 올림픽에 대한 파괴 행위”라며 “소련 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소련이 LA올림픽을 보이콧하자 그 뒤를 따라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베트남, 몽골, 쿠바,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등도 보이콧에 동참했다.
결과적으로 두 차례의 반쪽 올림픽이 서울올림픽의 위상을 높여주게 된다. 제 24회 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 동맹국들이 모두 참여하며 동서 화합의 촉매제가 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 서울올림픽에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북한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분단된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공산주의 국가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후계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 그는 수십년 동안 군인 출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친미 독재국가라는 국제적 시각을 탈피하기 위해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들의 참여에 공을 들이게 된다.
1988년 1월 12일 새벽 미라트 그라모프 소련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참가를 공식 발표했고, 이어 중국(14일), 베트남·체코(15일), 시리아(16일) 등의 참가발표가 이뤄졌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의 성공적인 첫발을 뗄 수 있었다.
박세직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은 당시 폐막식 이후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개발도상국도 올림픽을 치를 수 있다는 좋은 전례를 남겼으며 동·서가 한마당의 잔치를 벌임으로써 세계평화유지에도 일조를 했다고 생각한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잘못된 정치 선전장···인권유린에 악용
올림픽이 갈등과 반목이라는 요소를 해결하는 긍정적 요소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독재자와 잘못된 정부를 만나면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나치 독일이 개최했던 베를린올림픽이다. 1936년 독일의 나치는 올림픽을 자신들의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움직인다. 당시 나치는 독일 내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정책의 단점을 가리고 강하고 단결된 독일의 모습만을 강조하려 했다.
IOC는 1931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베를린을 지명하며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독일이 재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따르면 당시는 나치당의 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파를 탄압하는 동시에 스포츠를 비롯한 일반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던 시기였다.
1933년 4월 독일 내 모든 운동 기관에 “오로지 아리아인들로만”이라는 정책이 적용되며 유대인, 혼혈 등 비(非)아리아인 선수들은 모든 운동조직과 대회에서 퇴출되기 시작됐다.
나치 독일은 1936년 올림픽 기간 동안 자신들이 행한 인종차별 정책을 덮어두려 시도했다. 대신 올림픽을 통해 독일의 우수성과 평화 이미지를 전파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인권 유린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올림픽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다.
이 보이콧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어 스페인에서 ‘인민의 올림피아드(People's Olympiad)’라는 이름으로 대체 대회가 준비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며 해당 대회는 개막하지 못했다.
각국 대표단에 속한 유대인 선수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 등 49개국이 베를린올림픽에 참여하게 된다. 소련은 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다.
1936년 8월 1일 히틀러는 제 11회 하계올림픽 개회를 선언하게 되고 당시 가장 많은 선수단이 참여한 올림픽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베를린올림픽은 철저한 가림막 속에서 성공적으로 끝난 듯 보였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언론은 국제 사회로 화려하게 복귀한 독일을 반기는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올림픽 개최 후 불과 3년 뒤인 1939년 9월 1일 새벽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베를린올림픽 이후 올림픽에서 대형 정치이슈가 등장한 것은 30여년 뒤인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으로,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적 세리머니가 등장한다.
육상 남자 200m 결승 시상식에 오른 미국의 토미 스미스(금메달), 존 카를로스(동메달)는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이는 당시 미국 내에서 태동하던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경례 방식으로 ‘블랙파워 경례’ 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은메달을 딴 호주 선수 피터 노먼도 이들과 뜻을 함께하고 자신의 가슴에 ‘올림픽 프로젝트 포 휴먼 라이츠’라는 배지를 달았다.
이들은 올림픽 경기 후 자국으로 돌아가 “애국심이 없다”는 등의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운동선수들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들의 시위에 동조했던 호주 대표선수이자 은메달리스트였던 피터 노먼은 철저히 잊혀졌다.
노먼은 한 벌만 준비된 장갑을 ‘스미스와 카를로스 둘이 나눠서 끼어라’고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노먼은 백인 우월주의가 전반에 깔린 호주 사회는 물론 자국 육상계에서도 배척당했다. 차기 올림픽이었던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도 배제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그는 결국 2006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장례식 때 호주로 날아와 직접 관을 옮긴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인 그 누구도 그만큼 존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 때는 아프리카 32개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뉴질랜드 때문이었다.
뉴질랜드가 아파르트헤이트로 올림픽에서 퇴출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계속 럭비 경기를 해오자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를 IOC에 항의했다.
하지만 IOC가 뉴질랜드의 올림픽 참가를 허용하자 아프리카 국가들은 단체로 올림픽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결국 몬트리올올림픽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만 참가했다.
올림픽은 또 다른 정치 세력에 휘둘리기도 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을 겪은 몬트리올올림픽은 냉전의 상처까지 남기게 된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승인한 캐나다는 타이완(대만)이 중화민국 국호를 사용할 경우 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 인해 스포츠와 정치를 분리한 규정에 위배된다는 논란이 일었으나 캐나다 정부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고, 타이완은 결국 몬트리올 올림픽 참가를 포기하고 만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에는 내전을 겪고 있던 탓에 유고슬라비아와 마케도니아 국적의 선수들은 소속 국가 없이 대회에 출전했다.
◆올림픽의 아버지, 정치와 결합에 반대···후세들은 교묘한 이용
1894년 프랑스인 피에르 쿠베르탱은 파리회의에서 근대 올림픽 대회의 발전과 조정 역할을 위임받은 IOC를 이끌게 된다.
쿠베르탱과 14명의 위원들은 어떠한 외부세력의 개입도 없어야만 고대 올림픽의 쇠퇴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IOC와 그 구성원들은 세계 어느 나라나 조직에 영향을 주는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이를 기반으로 올림픽은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로 성장을 거듭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은 그 규모만큼이나 세계적인 이슈를 몰고 다니며 쿠베르탱과 14명의 위원들이 예상하지 못한 정치 무대에 오르내리게 된다.
앞서 제시한 각국의 독재자, 테러단체 등이 올림픽에 개입한 사례들이 그 증거다.
또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거의 사라졌지만 올림픽의 흥행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례는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이 평창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적극 지지한 이유도 흥행을 위한 물밑작업으로 꼽는다.
동계올림픽 최대 흥행 종목인 아이스하키에서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고민에 빠졌던 IOC에게 단일팀은 단연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특히 평창동계올림픽을 북핵 문제 해결의 계기로 삼으려는 문재인 정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올림픽과 정치의 결합으로 파생되는 순기능만을 주시하면서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소수를 외면하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 문화평론가는 “올림픽은 스포츠를 통해 평화와 화합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탄생했다”며 “다만 평화와 화합이라는 대명제에 100% 부합하기 위해 소수의 희생을 모른 체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올림픽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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