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6년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통해 경제학 사상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케인스 이전에 세계 경제를 지배한 사상은 '세이의 법칙'이었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으로 잘 알려진 세이의 법칙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이가 1803년 출간한 저서 '정치경제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이는 공급의 총량이 수요의 총량을 결정하기 때문에, 공급과 수요는 항상 일치한다고 봤다.
이전보다 공급이 많아진다 하더라도 대규모 공급을 통해 상품·서비스의 가격이 저렴해진다면 그에 알맞은 수요가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이는 과잉생산은 있을 수 없다는 고전경제학의 핵심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제국주의 열강은 세이의 법칙에 기반한 경제 사상에 경도돼 끊임없이 팽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케인스에 따르면 전체 수요가 공급을 결정한다. 수요 부족으로 생산자가 생산을 줄이고, 임금 하락을 가져와 또 다른 수요 부족 현상을 일으켜 실업과 물가 하락의 악순환인 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후 케인스의 사상은 세이의 법칙을 대신해 세계 경제학의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항공산업은 대공황으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굳건하게 세이의 법칙을 신봉하고 있는 것 같다. 국내 8개 주요 항공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올해 1월까지 가격 경쟁을 통해 공급량을 늘리는 데 주력해왔다. 티켓 값이 저렴해지면 어딘가에서 비행기를 타길 원하는 고객이 나타날 것이라는 신앙이 유지돼 왔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까지 흔들림 없는 사실처럼 보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항공 여객은 1억2336만6608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8년 1억1752만5898명보다 5%나 늘어난 규모다. 이 기간 비행기 티켓이 너무나 저렴해진 끝에 서울에서 부산에 가기 위해 KTX보다 비행기를 이용하는 게 더 싸다는 결론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계속해서 나타날 것만 같았던 수요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1, 2위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마저 국책은행으로부터 각각 1조2000억원과 1조7000억원의 자금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최근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된 40조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도 상당수 대형 항공사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저비용 항공사는 그나마 지원에서도 후순위로 밀려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어려움을 항공사가 자초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최근 몇 년 동안 면허를 남발해 경쟁을 부추긴 정부의 잘못이 크다. 1988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복수 항공사 체제가 도입된 이후 2005년 제주항공, 2008년 진에어와 에어부산, 2009년 이스타항공, 2011년 티웨이항공, 2016년 에어서울 등 신설 업체가 연속 등장해왔다.
오히려 항공업계에서는 정부가 면허를 남발하고 있다는 목소리를 높여 왔으나, 지방공항 활성화와 일자리 확대라는 명분을 앞세워 면허 신청을 반려하지 않았다. 실제 지난해에도 플라이강원, 에어로케이항공, 에어프레미아 3곳이 면허를 받았다. 세이의 법칙을 신봉한 것은 항공사 쪽이 아니라 정부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항공사들이 일시적 자금난으로 부도로 몰리는 사태를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육지의 섬 같은 우리나라의 환경상 항공산업의 전·후방 파급력이 높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번 기회에 비효율적이고 기형적인 국내 항공산업의 난립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항공산업은 코로나19 같은 위기 시 시장으로 존립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정치적 쟁점이 된 덕에 버티고 있다." 최근 만난 국책은행 관계자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항공산업이 세이의 법칙에서 벗어나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지 주목해볼 일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