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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정원장이 지난 3일 국정원 청사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 국정감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사진=국회사진기자단]
“동맹·다자주의 중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시대 개막을 앞두고 한·일 관계가 분수령을 맞았다.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조 바이든 당선인이 ‘한·미·일’ 공조 강화로 한·일 관계에 적극 관여할 것으로 점쳐지는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이 연일 일본을 방문, 양국 관계 개선 물밑작업에 나서면서다.
◆스가 취임 후 韓정부 고위관료 첫 만남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은 10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예방했다고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관방장관이 오후 정례기자회견에서 밝혔다.
박 원장은 스가 총리 예방 후 취재진과 만나 “사전에 일본 정부 당국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서 조율했고, 총리께는 문재인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와 한·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다”면서 “대북(對北)문제 등 (스가 총리의) 좋은 의견을 들었고, 저도 충분히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앞서 외교가에서는 박 원장이 이번 예방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을 거라는 관측도 나왔었다. 그러나 박 원장은 예방 이후 취재진과 만나 “친서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원장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 “한·일 양 정상이 해결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대화를 하면 잘 되리라고 본다”며 “(스가 총리도) 친절하게 좋은 설명을 많이 해주셨다”고 전했다.
이어 스가 총리의 저서인 <정치가의 각오-관료를 움직여라>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며 “스가 총리 책을 국정원에서 번역해서 읽어봤다고 사전에 말씀드렸더니 서명까지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덧붙였다.
박 원장은 지난 8일부터 이틀 동안 자민당의 2인자이자 20여년간 친구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다키자와 히로아키(瀧澤裕昭) 내각정보조사관을 연이어 만났다.
니카이 간사장은 전날 박 원장과 면담에 대해 “매우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충분히 신뢰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밝혀, 한·일 관계 개선에 기대감을 키웠다.
이와 관련 외교가에서는 박 원장이 과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잇는 ‘문재인-스가’ 선언을 제안, 한·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등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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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정원장(오른쪽)이 3일 국정원 청사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 국정감사에서 김상균 1차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기자단]
◆자산 현금화 난제…韓에 공 던진 日
하지만 정상 간 선언으로 복잡하게 얽힌 한·일 갈등을 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각자의 입장차이가 여전한 만큼 ‘해법’이 아닌 ‘정상 간 선언’은 문제 해결 진전에 효과가 없다는 지적인 셈이다.
한국은 강제징용 판결 문제는 사법부 소관이며, 피해자 권리 실현 및 한·일 양국 관계 등을 고려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한국 측에 수용 가능한 해결책을 재차 요구하고 있다.
이날 일본 외무성도 스가 총리와 박 원장의 예방 결과에 대해 “박 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 방일한 것은 환영한다”면서도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는 한국 측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납북자 문제 등 대북 대응방안에 한·일과 한·미·일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박 원장의 방일에 대해 “양국 모두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악화하는 것을 막고자 상황관리 차원에서 고위급 인사교류 목적으로 방문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중·일 정상회의도 무산되는 분위기이고, 최근 후쿠시마(福島)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로 양국 관계가 악화할 위기에 놓였다”면서 “(더 악화하기 전에) 일본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 (방일이) 이뤄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박 원장이 한·일 관계 해결사로 나선 배경에 대해선 현재 한·일 간 문제가 국장, 실장 등 외교 관료들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달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관료보다는 정치인이 (일본에)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일본 정치계에) 비중이 있는 사람(박 원장)이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박 원장의 방일 기간 ‘바이든 시대’ 출범에 대비한 한·일 간 대미(對美)정책 논의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시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 기조를 계승해 ‘한·미·일’ 3각 공조 강화 정책을 펼칠 거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의 ‘위안부 합의’ 개입 사례와 같이 한·일 갈등을 해결하려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바이든 당선인이 대통령 취임 후 첫 정책과제를 코로나19 대응으로 잡은 만큼 한·일 간 외교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거란 의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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