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칼럼] 전쟁을 부르는 '잘못된 역사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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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3년이 훨씬 지났다. 트럼프의 재집권 이후 얼마 동안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는 듯하였으나 현재로선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지 불확실하다. 푸틴은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몇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무자비한 핍박으로 ‘인종청소’의 위기에 처한 동남부 지역 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고 나아가 나토의 동진 자제 약속을 파기하고 러-우 국경 지역에서 군사 기반 시설을 확장하고 우크라이나를 무장시키는 등 서방의 안보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나라의 이웃 나라에 대한 무력행사에는 양국 관계에 대한 역사 인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으며 이번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번 전쟁을 강대국의 약한 이웃 나라 침략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북한의 참전 이후에는 북한군의 동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번 전쟁을 심도 있게 그리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푸틴은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특수 군사작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반영된 표현이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으며 분리될 수 없다고 하였고,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적은 없으나 러시아에서 이번 기회에 역사적 영토, 즉 ‘새로운 러시아 (Новая Россия)’를 회복하자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새로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흑해 북부 연안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18세기 후반 러시아가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획득한 땅이다. 러시아 혁명 후 1922년 레닌은 이 지역의 대부분을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에 속하도록 하였고 1954년 흐루쇼프는 크림반도를 편입시켜 주었다.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는 이러한 경계에 따라 소련에서 분리·독립하였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공격에는 이러한 역사도 동인(動因)으로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푸틴은 과거 러시아의 일부였던 지역을 회복하고 키예프에 친러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에서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력의 주축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적이 거의 없는 서부 지역이며 이들은 1941년 6월 나치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이 틈을 타 러시아에서 독립하려고 나치독일에 협조하였다. 그래서 푸틴이 자꾸 ‘나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2017년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part of China)”고 하였다고 한다. 시진핑의 말은 맞는 것인가? 조선왕조는 분명히 명(明)과 청(淸)에 대해 사대하였으므로 중국 지도자로서는 그렇게 주장하거나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영토 안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는 중원의 지방정권이다. 황당하고 말이 안 되나 중국은 고구려, 부여, 발해 등을 ‘중국사’로 다루고 있다. 고대로 올라가면 중국의 동북아 역사지도에는 BC 2세기 한(漢) 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다는, 이른바 한군현(漢郡縣)의 범위가 한반도 북부는 물론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 인식이 오늘날의 한-중 관계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2015년 8월 MBN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미국 측에 북한 급변 사태 발생 시 북한 지역을 나누어 점령해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의하였는데 미국 측은 이를 거절하고 한국 정부에 중국의 제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현재 북-중 국경지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중국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압록강에서 도하 훈련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남북한 사이에 무력 충돌이 생기면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북한 내부에 심각한 혼란이 있으면 즉각 북한 땅에 군대를 보내 최소한 중국에 순종하는 정권을 세우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의 관점에서 북한이 미국의 위협에 대한 완충지대로 필요할 것이라는 일반적 이해와도 거리가 먼 것이다. 중국은 수년 전부터 서해의 동경 124도 서쪽 해역을 자신의 배타적인 작전구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해 잠정조치수역에 대형 철제 구조물을 무단 설치한 데 이어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 일부까지 포함하여 항행 금지 구역을 설정했다.
 
한 나라의 대외정책에 있어 과거와 현재는 상호 작용한다. 러시아 관점에서 역사를 내세우면 우크라이나 동남부는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현재 그 지역은 어쨌든 주권국가 우크라이나의 영토이다. 이 땅을 일방적으로 침범한 것은 현행 국제법상 명백한 ‘침략’ 행위이다. 이 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시진핑의 말은 섬뜩한 것이다. 역사 인식은 객관적으로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 자체가 심각한 동인(動因)으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이웃 국가가 과거에 대해 매우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을 경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최소한 그러한 인식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중국의 황당한 궤변에 대해 반박은커녕 침묵으로 일관하여 사실상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연구재단은 국경사(國境史)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서 ’외교 마찰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 쪽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중국 방문 중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이라고 치켜세우고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하였다. 그 대통령에 그 대사라고 문재인 정부의 초대 주중 대사는 시진핑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나서 방명록에 ‘만절필동 공창미래(萬折必東 共創未來)’라고 적었다. 그는 조선 시대에 ‘만절필동’이 ‘오랑캐가 쳐들어와 1만번에 걸친 굴욕을 겪더라도 우리는 명나라를 섬기겠다’는 뜻인 줄 몰랐나? 문재인 정부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역사 인식이 전쟁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 혹시라도 그러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후보는 중국이 되지 않을까? 이웃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일은 학문적으로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지역의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법대 법학과 ▷영국 옥스퍼드대 외교관 연수과정 수료 ▷주우즈베키스탄 공사 ▷ 주이르쿠츠크 총영사 ▷주러시아 공사 ▷상명대 글로벌지역학부 초빙교수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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