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칼럼] 표준, 규제가 아닌 미래를 위한 약속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글로벌 통상 질서가 격변하고 있다. 한때는 예외적 조치처럼 보였던 미국의 관세 정책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무역마찰을 넘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구조적 변화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럽산 제품에 대해 30% 전면 관세 부과를 언급하며 보호무역주의 회귀를 시사했고, 유럽연합(EU)은 즉각적인 보복 조치를 예고하며 글로벌 통상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상호관세 유예 종료를 앞두고 협상 수위를 높이고 있다. 대통령실과 산업·기재·외교부가 총출동한 ‘2+2 통상회담’은 고조되는 긴장 속에서도 전략적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주목해야 할 진짜 청구서는 따로 있다. 바로 미국이 내밀고 있는 ‘표준의 청구서’다. 최근 미국은 자국 중심의 기술·산업표준 전략을 명문화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통상 조치가 아니라 경제 안보를 포괄한 ‘비관세 장벽’ 구축의 신호탄이다.
 
사실 미국은 제조업 기반이 약한 국가다. 그럼에도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기술 주도권을 ‘표준’이라는 이름으로 선점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중국, 일본 역시 자국 산업 중심의 표준 확산을 통해 공급망 통제력을 확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차 충전방식, AI 알고리즘, 사이버 보안 기술 등 4차 산업의 핵심 규격을 둘러싼 이른바 ‘표준 패권전쟁’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과연 이러한 격변의 파도 앞에서 우리나라는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정부도 글로벌 ICT 표준 개발 및 표준화 역량 강화를 목표로 국내외 표준화 활동을 적극 지원 및 대응하고 있다. 인공지능(AI), 5G·6G 통신, 데이터 등 국가 전략기술 중심의 표준개발과 국제표준 선점을 위한 로드맵을 추진 중이며, 국내 포럼 운영, 전문가 양성, 중소기업 맞춤형 표준 컨설팅 등 다방면에서 체계를 갖추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방역 표준이 ISO에 채택된 사례는 K-표준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정표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부 주도 하에 일부 대기업만이 표준 개발에 참여하는 구조에서는 국제 표준화 무대에서 지속 가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민간 주도의 표준 전략이 정착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룰(rule)을 따르는 쪽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표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직도 많은 기업은 ‘표준’을 규제와 동일시하며 부담으로 여긴다. 그러나 표준이란 룰은 규제가 아니다. 규제는 법적 강제성을 갖지만, 표준은 자율적 채택을 전제로 하는 시장의 약속이다. 오히려 표준은 대량생산과 공정거래, 소비자 보호를 가능하게 한 산업화의 근간이며,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성장의 출발점이었다.
 
최근에는 비가시적인 서비스 영역까지도 표준화가 확장되고 있다. 콜센터, 차량정비, 시설관리 등 1,400여 개 국내 서비스 업체가 KS인증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서비스 한류’로 평가받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단순한 인증의 의미를 넘어, 국가 경쟁력의 또 하나의 축이 되고 있다.
 
그럼 과연 기업에게 표준은 불필요한 규제인가?
 
이제 표준은 규제가 아닌, 글로벌 시장 진입의 기본 요건이다. 신뢰받지 못한 제품과 서비스는 소비자에게 외면받고,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개별 기업의 품질 관리를 법으로 강제(Quality Act)하며, 소비자 보호와 산업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협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시장에 유통되지 않도록 정책적 관심과 산업계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역사적으로 산업화는 표준화로부터 출발했다. 표준은 기업의 대량생산과 소비는 물론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는 필수적 요소였으며, 이를 통해 소비자는 일정 수준의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 산업표준화를 통해 국가빈곤의 터널을 빠져나왔고, '한강의 기적'이라는 고도성장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표준은 규제가 아닌 경쟁력의 씨앗이었다.
 
최근 제품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확대되며 표준화는 더욱 절실하다. 서비스는 상품과 달리 비가시적이며, 소비자 경험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서비스 표준이 있어야만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글로벌 경쟁에서도 품질로 승부할 수 있다. 이처럼 표준은 시장 진입의 자격이자 소비자 보호의 울타리이다. 불량 제품과 불편한 서비스가 넘쳐나는 사회는 결국 신뢰와 품질이 사라진 사회이며, 이는 곧 기업과 국가 경쟁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표준은 단순히 규제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공정하고 안전한 경쟁의 전제 조건이다. 표준을 준수한 상품과 서비스만이 시장에 진입하여 무한경쟁을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상품과 서비스는 시장에 진입하지 않아야 하며, 고객으로부터 외면받아야 한다. 표준의 룰에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협하는 상품과 서비스가 시장에 공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책원칙과 국민인식이 시장경쟁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단지 ‘강제’가 아니라, 기업이 지켜야 할 공정한 출발선이 되는 것이다. 또한, 표준을 제정하는 것은 게임에 있어 출발선과 룰을 정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 기업들은 이를 등한시하였다. 기업들이 새로운 룰을 만들기 위해 표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국제통상에서의 경쟁력은 더 이상 가격이 아니라 ‘기준’을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은 이제 표준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을 만드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인프라와 제도적 기반을 조성하고, 중소·중견기업도 함께 뛰어들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 총성과 화약 냄새 대신, 기술과 표준을 무기로 한 조용한 패권 경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표준은 규제가 아닌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김재영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표준·지식학과 교수 ▷고려대 경영학 박사 ▷한국정보시스템학회 이사 ▷4단계 BK21 융합표준전문인력 교육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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