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간 관세 협상이 타결되면서 당초 25%로 거론되던 한국산 수출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율이 15%로 낮아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중대한 고비를 넘긴 것”으로 환영했고, 한국은행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 역시 이번 협정으로 기업들이 직면한 불확실성이 일부 완화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낙관하긴 이르다. 미국이 특정 품목에 대해 추가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수입에 대한 미국 정부의 향후 정책 방향에 업계의 관심이 몰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가 ‘최혜국 대우(MFN)’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모든 수입 반도체에 100%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산업은 한국 전체 수출의 약 20%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 막대한 가치를 지닌 핵심 산업이다. 더불어 반도체는 스마트폰과 IT 기기, 클라우드, AI 등 거의 모든 첨단 기술의 핵심 부품으로, 그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대만과 중국의 반도체 공급업체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미국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기회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오는 한미 정상회담이나 미국 정부의 추가 발표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다양한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대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시나리오 분석(scenario analysis)’이다. 이는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기업들은 단일 예측에 의존하기보다는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여러 가지 ‘만약의 상황(What-if future)’을 고려해 미래를 전략적으로 계획하고 탐색해야 한다. 즉, 선형적인 전망에서 벗어나 주요 변수를 파악해 미래의 다양한 상황을 그려보고, 각 시나리오에 따른 시사점과 전략적 선택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다른 여러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필자는 반도체 산업을 예시로 설명하고자 한다.
미국발 불확실성이 지속하는 가운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미래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는 변수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 관세의 강도와 지속 기간이며, 다른 하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유연성 정도다. 이 두 변수는 외부 압력과 내부 적응력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전략적 의사결정을 위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데 있어 그 기반이 된다.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협상을 통해 미국이 관세를 철회하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도 점점 더 유연하고 상호 연결된 구조로 재편되는 “개방형 경로(open pathway)” 상황이다. 이를 통해 지역을 넘나드는 공급업체 및 고객과의 파트너십이 확대되고, 협업이 강화되는 환경이 조성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생산 및 물류를 최적화하며, 효율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현재의 전략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관세는 철회되지만, 공급망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특정 지역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가짜 평온(false calm)” 상태다. 이 경우, 기업들은 일시적인 수익성 개선과 매출 성장이라는 단기적 호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공급망 회복력 확보, 리스크 분산 등 꼭 필요한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향후 닥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잠재적 혼란에 대비해야 한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관세는 유지되지만 글로벌 공급망의 유연성이 높은 상태를 의미하는 “유연한 대응(adaptive diversification)”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기업들은 공급망을 조정해 지정학적 리스크를 줄이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동남아로 생산 일부를 이전하거나, 베트남이나 인도 등에서 패키징 및 테스트 공정을 확장하고, 중국과 같은 고위험 지역 이외 지역에서 소재를 조달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관세가 더욱 확대되고,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전 세계 무역 질서가 점점 더 경직되는 “지정학적 교착(geopolitical gridlock)” 상태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들은 시장 진출 전략의 현지화가 필수적이며, 고객과의 관계 또한 각 지역의 규제와 수요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기업의 활동과 운영은 무역 블록을 중심으로 조정되어야 하며, 수출 통제 및 보조금 정책도 감안해야 한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탈중앙화(decentralization)가 장기 전략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현지 제조, 패키징, 컴플라이언스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확률 게임이 아닌 전략의 문제
시나리오 분석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최근 시장 상황과 정책 환경의 변화를 비추어 봤을 때,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직면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나리오는 ‘유연한 대응’ 시나리오다.
이번 15% 관세 합의는 가까운 동맹국 사이에서도 관세 조치가 유지될 수 있다는 신호이며, 따라서 유연한 대응 시나리오가 가장 설득력이 높다. 한국 반도체가 미국의 최혜국 대우 약속에 따라 100% 관세를 피할 가능성이 높지만, 구체적인 적용 수준은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이와 동시에 동남아 국가들이 새로운 제조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고, 미국이 국가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생산 역량을 자국으로 이전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유연성은 점차 확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유연한 대응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가짜 평온 시나리오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현재의 무역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한국산 반도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AI나 고대역폭메모리(HBM) 같은 차세대 기술에 필수적인 반도체 부문에서 그렇다. 실제로 올해 상반기 한국의 대미 수출은 전체적으로 감소세를 보였지만, 반도체 수출은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또, 미국이 한국 정부의 반도체 협력 제안에 관심을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관세 완화를 위한 전략적·외교적 해법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더불어, 중국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내 영향력을 계속 키우고 있으며, 공급망의 지역적 편중 현상이 단기간 내 해소되기 어렵고, 이에 따라 구조적 경직성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아직 미국과 무역 협상을 진행 중이며, 그 결과는 반도체 산업을 넘어 더 광범위한 지정학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이러한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각 시나리오에 따라 기존의 전략적 강점과 취약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공급망 다변화와 같은 후회 없는 조치(no-regret moves)를 도출해야 한다. 이러한 시나리오 플래닝은 조직의 회복 탄력성과 장기적인 민첩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의 연간 전략 수립 프로세스에 체계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오랜 기간 당연시해 온 글로벌 무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한국 기업들은 변화하는 지정학적 역학 관계와 불확실한 무역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주도권을 갖고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 소개
퍼 스테니우스(Per Stenius)는 2010년 핀란드에서 경영 컨설팅 기업 레달(Reddal)을 설립한 창립자 겸 CEO로, 액센츄어와 맥킨지 등 글로벌 컨설팅 기업과 벤처 캐피털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경영 전문가이다. 기업 가버넌스와 전략 수립을 전문으로 하며, 다수의 스타트업 창업 및 경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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