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임진왜란 도공의 기술 …고흐와 모네의 영감이 되다

  • 몸에서 문화로, 창조에서 전파로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요즘 날씨가 한여름보다 더 더운 느낌이다. 입추가 지났으니 더위가 한풀 꺾일 만도 한데 여름날씨의 마지막 발악일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매일 땀으로 샤워하며 절감하고 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니 몸의 온도유지가 일정치 못하면서 콧물과 재채기가 그치질 않는다. 내 몸도 변화를 혼란스러워 하는 거 같다. 그래서 요즘 부쩍 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한국·중국·일본은 오랫동안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나 음양오행론 같은 세계관 안에서 몸을 이해해왔다. 몸은 소우주(小宇宙)로서 자연과 호흡하고, 장부와 기혈은 하늘·땅·사계절과 연결된 질서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관에 변화가 찾아왔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통해 <해체신서>(解體新書, 1774년)라는 독일의 해부학자 요한 쿠르무스의 <해부학 입문(Anatomische Tabellen)>네덜란드어 판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 학자들은 직접 시체를 해부하여 기존의 한의학적 설명과 맞지 않는 부분을 확인했고, 이를 통해 몸=자연 질서의 축소판이라는 직관적·우주론적 이해에서 몸=해부 가능한 물질적 구조라는 실증적 이해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변화는 단순히 의학의 전환을 넘어, 인간관과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을 촉발했으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이해하다’ 혹은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하는 과정은 크게 '분석적 지식'과 '직관적 지식'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석적 지식 (Knowing by Analysis)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각각의 부분을 탐구하고, 그 관계를 파악하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며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관찰-분석-추론-종합의 과정을 거치며 검증하는 것이다.

직관적 지식(Knowing by Intuition)은 분석과정 없이 대상을 한 번에,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논리적 추론이 아닌, 경험과 감각, 그리고 무의식적인 통찰력에 기반한다. 즉각적이고 주관적이며 비언어적인 것이 특징이다. 오랜 경험 축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대상에 대한 내재적인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오랜 시간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답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상을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숙련된 장인이 망치 소리만 듣고도 쇠의 온도를 아는 것은 직관적 지식이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소리와 온도의 관계가 그의 몸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쪼개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논리가 발달했고, 직감으로 전체를 아우르려는 태도에서는 통찰이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직감은 논리적 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이렇다'라고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그냥 느낌이 그래', '내 경험상 이래'와 같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요즘 한국의 국회나 청문회 등을 보면 정상적인 대화를 볼 수 없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 대화하기 보다는 고함지르기가 자랑이고 윽박지르는 것이 일상이다. 솔직히 이들을 좀 배운 지식인이나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라고 하기엔 낯부끄럽다.

통찰의 노동자, 논리의 감독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현장 문제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을 갖게 된다. 노동자의 몸은 수십 번, 수백 번 같은 작업을 반복하며 문제의 징후를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 소리는 용접 부위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이 냄새는 전기 합선이 곧 일어난다는 뜻이다"와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직감으로 상황을 '안다'.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이렇게 하면 돼"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생긴다.

반면, 감독관은 도면과 규정, 공학적 지식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현장을 관리하려고 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눈으로 확인하고, 수치를 측정하고, 관련 규정을 찾아보는 등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과정을 거치려 한다. 감독관의 역할은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납득시킬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규정에 어긋나니 다시 해야 합니다"와 같이 원칙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의 차이는 종종 현장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감독관이 현장의 미묘한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절차를 고집하며 일을 지연시킨다고 느끼며 화부터 낸다. 감독관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검증되지 않은 개인의 경험만 믿고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이 충돌은 단지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가'에 대한 갈등이기도 하다. 경험과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와 논리와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가 부딪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식은 서로를 보완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의 직관적 통찰이 문제의 조기 발견에 도움이 되고, 감독관의 논리적 분석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경험이 이론으로 정립되고, 감독관의 논리는 현장에서 더 유용하게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현장의 안전교육에는 주의사항 전달이나 기능적 교육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교육내용이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작년 이맘때 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그림 그리는 작가로 참가했었다. 유럽에 간 김에 런던, 파리 그리고 헬싱키를 돌아보았다. 주로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우연인지 모르지만 미술관마다 인상파 그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인상파가 일어날 당시 유럽은 일본에서 건너온 우키요에(浮世絵)라는 목판 인쇄그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일본 도시 상인과 서민 사이에서 목판 인쇄로 대량 제작된 우키요에는 값싸고 친근한 대중문화였다. ‘떠도는 세상(浮世)’이라는 뜻의 우키요에는 가부키나 노우 공연의 안내 포스터 출연 배우나 잘나가는 기생, 명승지, 그리고 일상생활이 담긴 자유로운 표현의 예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우키요에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과정에서 우키요에 목판화가 포장재(완충재)로 실려 나갔는데, 유럽 상인과 예술가들은 우연히 이 목판화를 발견해 그 신선한 시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평면적 색면, 비대칭 구도, 윤곽선 강조, 일상 속 순간의 포착 방식을 적극 수용하며 자포니즘이라는 붐이 형성되었다.

클로드 모네는 일본 다리와 연못을 모티브로 ‘수련 연작’을 그렸으며, 빈센트 반 고흐는 히로시게(広重)의 ‘명소 에도 100경’을 모사했고, 에드가 드가는 우키요에에서 무희들의 동작 포착과 화면 잘라내기를 학습하여 발레 무희를 생생히 표현했다. 클림트의 '황금 시대'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반복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들도 우키요에가 가진 장식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우키요에는 근대 서양 미술의 자유로운 시각, 언어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과 문화 기술의 이동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도자기 덕분이었다. 사실 돈이 된 것은 도자기였다. 일본 도자기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컸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인구 감소와 경제 쇠퇴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하지만 일본에선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의 뛰어난 장인들, 특히 도공들이 일본 각지로 이주하며, 그들의 기술이 일본 도자기 산업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임진왜란이라는 비극 속에서 조선 도공의 기술과 일본 상업문화가 결합해 일본은 도자기와 우키요에를 세계에 알렸고, 유럽 미술 혁신을 이끌었다.

조선은 '기술'이라는 문화적 자산을 소유했으나, 이를 제대로 평가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부족했지만, 일본은 이 기술을 받아들여 그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제공했고, 이는 일본 상공업과 나아가 유럽 무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근대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류학자 최협 교수는 문화란 누가 최초로 무엇을 만들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책 <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에서 강조되는 대목 중 하나가 바로 “문화란 창조보다 전파의 방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화가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힘은 ‘무엇을 처음 만들었는가’보다 ‘그것이 어떻게 퍼지고, 어떻게 공유되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의 사용, 농업, 철기, 문자 등은 한 곳에서만 창조되었더라도, 그것이 전파·수용·응용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사회가 변하고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문화는 창조가 아니라 전파 속에서 힘을 얻는다. 몸의 지혜든, 노동의 경험이든, 예술의 감각이든, 나눠지고 공유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처음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형되며 확산되느냐다. 직관과 분석, 경험과 논리의 차이를 넘어, 상대에 대한 증오와 열등감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문화는 지금 어떻게 서로에게 전해지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기후위기의 시대, 패권전쟁의 시대에 흔들리는 사회에서 새롭게 붙잡아야 할 문화의 생명일 것이다.

 
공사현장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전장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자기 혁신을 이룰 수양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장은 언제나 기계소리 망치소리 깨지고 자르는 소리 그리고 고함소리가 요란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가운데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우아한 몸짓으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저자 제공
공사현장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전장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자기 혁신을 이룰 수양의 장이 될 수 있다. 현장은 언제나 기계소리, 망치소리, 깨지고 자르는 소리 그리고 고함소리가 요란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가운데에서 고전음악을 들으며 우아한 몸짓으로 작업하는 사람도 있다. [사진=저자 제공]



이두수 작가 소개
idoosoo@navo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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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희생된 우리 도공들의 뛰어난 예술혼이 시공간을 넘어 반 고흐와 모네 같은 서양 미술의 거장들에게까지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자부심과 동시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아픈 역사 이면에 숨겨진 거대한 문화적 파급력을 새롭게 조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지닌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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