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철 글로벌비지니스연구센터 원장]
그러나 표면적 문제가 아닌 본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해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상용(B-1) 비자라는 편법을 이용했다. 이유는 주재원(L-1 혹은 E-2) 비자 혹은 전문직 취업(H1-B) 비자를 신청했지만, 미국인을 더 많이 고용하라는 미국 정부의 지침에 번번이 막혔다. 미국 내에 전문 기술자가 부족하다는 점도 이러한 불법을 부추겼다. 미국 국내법의 정당한 집행 잣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뒤늦게 정부나 기업이 수습책을 마련하느라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 애처롭다. 우리와 유사하게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호주나 싱가포르가 미국 정부와 협의해 단기취업(E-4) 비자를 얻어낸 사례와 비교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안일하고 무모한지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앞으로도 700조 정도의 추가 투자가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기업의 70%가 이대로는 사업을 하지 못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분출된다. 공장 건설이 지연되면 투자 비용이 최소한 30%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특별 대책이 단기간에 마련되지 않으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양국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모두에게 엄청난 손해가 생기는 것이 불가피하다. 어느 쪽이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 정도 선에서 수습할 수 있는 현명한 대책을 선택해야 한다. 공장 건설 관련 미국의 전문 인력이 없다는 점과 한국 측이 요구하고 있는 단기 전문 비자 인력은 공장 건설이 완료되면 당연히 한국으로 철수한다. 조기 공장 가동이 양측에 윈-윈이 됨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정부나 기업이 무모하게 해외 사업을 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최근 미-중 충돌이 격화된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경제·안보가 하나의 축에서 움직인다. 기업과 기술이 이 살벌한 체스판의 전면에 포진되어 있다. 그래서 정부와 민간이 한 팀이 되어야 하고, 특히 국가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미국과 중국과 같은 강대국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수시로 약자에게 압박을 가한다. 압박을 받은 국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민간을 보호하고 이익이 침해받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 국가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기업을 마치 총알받이로만 쓰고 그들이 해외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전 조치를 소홀히 한다면 국가의 존재할 이유가 없다.
심히 우려되는 것은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투자가 제2의 중국 투자 실패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투자 진출 형태는 다르다. 중국에 대한 우리 기업의 과잉 투자는 시장에 대한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시장의 변화와 시장 내에서의 공급망 재편 추이를 간과했다. 또한 중국이 우리와 체제가 다르고, 기술력이 우리를 추월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피해와 미국 등 서방과의 충돌을 거의 무시했다. 단지 시장이 지속해서 확대되고 우리에게 우호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당시 이에 대한 염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위 중국통이라는 전문가들이 계속 이를 부추겼다. 결과적으로 중국 시장은 한국 기업의 무덤이 되는 비참한 말로를 현재도 경험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투자도 이러한 실패의 재판이 되지 않으려면 철저한 시장 분석과 공급망 재편 추이, 그리고 미국과 주고받을 손익계산이 확실해야 한다. 중국 시장에서 실패하니 단순히 대안 시장으로 미국 시장에 목을 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떠밀리듯이 미국에 들어가는 것은 금물이다. 이번 문제가 생김으로 인해 미국 시장에 대한 불확실성이 훨씬 커졌다. 중국이나 동남아보다 공장을 짓고 가동하는 것이 중국이나 동남아 등 다른 진출 지역보다 비싸고, 고율 관세로 인한 원자재 조달 비용도 많이 든다. 보조금 등 미국 정부의 지원 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점 등 고민해야 할 요소들이 수두룩하다. 차라리 이럴 바에는 관세를 물고 공장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적 한숨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이제 미국에 수세적으로 끌려다닐 일이 아니고 공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들이 더 안달이 나도록 해야 한다. 당장 공장 건설 기술자들을 위한 E-4 비자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미국 일자리는 공장 건설이 끝나야 창출된다는 현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비자 문제의 원천적 해결을 위해 ‘한국동반자법(Partner with Korea Act)’통과를 관철할 수 있는 외교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기업의 관행도 문제지만 정부의 무관심과 무지가 이런 사태를 재발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대응 조치가 필요하다. 유사한 애로를 겪고 있는 일본 공장에선 생기지 않고 한국 공장에서만 생겨났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투자와 기술이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현안을 패키지로 정리해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국가가 제 기능을 해야 소 잃고 외양간을 다시 고칠 일이 없어진다.
김상철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경제대학원 국제경제학 석사 △Business School Netherlands 경영학 박사 △KOTRA(1983~2014년) 베이징·도쿄·LA 무역관장 △동서울대 중국비즈니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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