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재 논설고문]
아파트 가격 상승은 내 집 마련이 절실한 서민, 평수를 넓히거나 주거 환경이 좋은 곳으로 옮기고 싶은 중산층,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젊은 세대에게 좌절감과 상실감을 안긴다. 아파트 값이 큰 폭으로 뛰면 계층 간, 세대 간 부(富)의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 서민 정당을 표방하고 서민이 지지 기반인 민주당으로서는 ‘집권=아파트 값 상승’은 인정할 수 없는 프레임이다.
국민의힘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선량한 국민들의 자산 사다리를 걷어차고 주거권을 짓밟는 나쁜 정책이라며 전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갭 투자(전세 끼고 주택 매입)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몰상식한 발언으로 민심을 화나게 한 고위 공직자를 ‘부동산 5적’으로 규정하고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정권’이라며 몰아세운다. 여당은 전임 정부가 공급을 소홀히 한 탓이 크다고 항변하지만 부동산에 발목이 잡힌 과거의 전철(前轍)이 반복되지 않을까 긴장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시기에 유독 아파트 가격 상승률이 높은 것은 민주당의 책임일까. 절반은 사실이고, 절반은 사실이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표면상 잠잠했던 서울 부동산 시장은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새 정부가 13조원 규모의 소비쿠폰을 발행하고 확장재정에 나설 태세를 보이자 시중 유동성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퍼졌다. 증시가 먼저 반응을 보였고, 아파트 가격도 서울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상승 폭이 커졌다. 역대 민주당 정권이 각종 보조금 지급과 복지 확대를 위해 돈을 푼 것이 아파트 가격을 자극하는 방아쇠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한 패턴이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에도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금리 인하와 민생지원금 지급, 가계대출 확대가 맞물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다. 재정지출 확대와 저금리 정책은 초기에 경기부양 효과를 내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심리를 부추겨 부동산을 포함한 실물자산 가격을 상승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이재명 정부가 대규모 재정적자를 공언한 순간 서울과 수도권 요지의 아파트 가격이 뛸 여건은 갖춰진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도 몇 달 전까지 부동산 정책을 실행한 집권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아파트 가격 폭등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윤석열 정부는 생애최초대출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80%까지 허용하고 주택가액 한도를 없애 이번 폭등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갭 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율을 최고 75%에서 45%로 완화하고 공정시장가액비율을 낮추는 식으로 보유세 부담을 줄여 빚을 내서 집을 사는 게 유리하다는 인식을 심었다. 문재인 정부의 ‘아파트 흑역사’도 거슬러 올라가면 전임 박근혜 정부가 부동산 경기 회복을 위해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완화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현재의 부동산 시장은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의 정책 유산이 누적되면서 복합적으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생겨난 결과라고 봐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뉴타운 해제로 인한 공급 부족, 윤석열 정부의 대출규제 완화와 보유세 인하, 오세훈 서울시장의 강남 3구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등이 부동산 상승 에너지를 축적시켰다. 부지 조성에서 착공을 거쳐 실제 입주까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 아파트 공급의 시차를 고려하면 현재의 공급 절벽은 현 정부가 아니라 전임 또는 전전임 정부의 책임이다.
그렇더라도 이재명 정부가 이번 폭등을 촉발한 주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울 아파트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유동성을 늘리겠다는 신호를 보내 부동산 시장에 잠재해 있는 불씨를 지피는 오류를 범했다. 유휴성 자금을 증시로 유도하면 과거 어떤 정권도 하지 못한 경제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을 했지만 시장은 정부의 의도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부는 집값을 잡기 위해 초강력 대출 규제(6·27), 공급 확대(9·7), 규제지역 확대 및 대출한도 추가 강화(10·15) 대책을 발표했다. 6·27 대책에서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하고 9·7 대책에서 공공주도 개발을 천명했지만 약발이 먹히지 않자 10·15 대책에서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사상 초유의 삼중규제(조정대상지역, 투기과열지구, 토지거래허가구역)로 묶었다. 규제 대상을 전례 없는 범위로 넓히고 대출규제 강도도 역대 최고급으로 높인 것은 가격이 오르는 곳을 골라 ‘핀셋 규제’를 가하자 인접 지역으로 투기수요가 몰렸던 ‘풍선효과’가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
정부가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대책을 내놓은 것처럼 시장도 학습효과로 무장하고 있다. 규제지역 거래가 끊기자 동탄 구리 등 규제에서 벗어난 인접 지역으로 갭 투자가 옮겨가고 있다. 서울 강남 3구를 중심으로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 현상은 더 공고해졌다. 한국은행의 10월 주택가격전망지수는 122로 문재인 정부 당시 집값이 급등했던 2021년 10월(125)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의 규제가 아무리 세도 버티면 집값은 오른다’는 믿음 또는 자기최면이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 퍼져있는 것이다.
부동산 문제는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해법은 다양한 공론의 장(場)을 통해 이미 나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을 못하고 있을 뿐 정부도 알고 있다.
부동산 정책을 성공으로 이끄는 힘은 아파트 가격을 반드시 잡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완결성 있는 정책, 정부의 진정성을 믿는 시장 참여자들의 신뢰에서 나온다. 수요 관리와 공급 확대, 세제 개편의 정책조합을 3종 패키지로 제시해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고 투기성 수요가 억제돼 아파트 가격이 정상 범위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세금을 포함해 정부가 가용 가능한 모든 카드를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 정책의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정부·여당의 대응은 가장 중요한 신뢰 점수를 까먹는 쪽으로 가고 있다. 대출규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통령실과 정부에서 보유세를 올리는 방안이 거론되자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여당이 곧바로 제동을 걸었다. 표심에 불리한 정책은 선거 이후로 늦추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 작용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보유세 인상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정부는 부동산 대책에서 핵심 카드 하나를 잃었고, 시장은 정부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대책이 지방선거보다 뒷전이라는 게 확인되면 잠재적 투기 수요와의 대결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부동산 투기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경고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금융감독원장의 강남 다주택 보유와 석연찮은 일련의 거래, 국토교통부 전 차관의 갭 투자와 실언 등 부동산 최전선에 선 고위층의 위선과 공감능력 결여 행태는 신뢰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정부로서는 뼈아픈 실점이다. 부동산처럼 이해가 첨예하게 걸린 사안에서 메신저가 믿음을 주지 못하면 메시지도 공허해진다.
거래를 아예 중단시키는 충격요법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단지 시간을 벌었을 뿐이다. 수요 억제책은 충분히 나왔으니 시장 참여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공급 계획으로 불안심리를 가라앉히고 패닉바잉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0일 “연말까지 본격적으로 부동산 최대 공급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특히 서울 지역에서 밀도 있게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계획은 현 정부 집권기간 중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좌우할 변곡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공공주도 개발의 구체적인 방식과 함께 서울 시내 재개발재건축을 중심으로 민간 부문의 주택 공급을 촉진하고 유휴부지 발굴 등을 통해 택지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로드맵이 담겨야 한다.
서울 일부 지역 아파트 가격은 이미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 이재명 정부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강남 부자의 재산이 더 늘어난다’는 비아냥 섞인 속설을 끊어내겠다는 결기가 있는가. 정녕 아파트 가격을 잡고 싶다면 선거를 의식하지 않고, 정치적 유불리와 상관없이, 진정성 있는 대책으로 승부하겠다는 당정의 의지부터 하나로 모으기 바란다. ‘내로남불’ 비판을 받는 항목 중 시장 상황과 맞지 않는 내용은 과감히 손질해 상처받은 민심에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이기 바란다.
주택은 국민들의 자산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삶의 질을 결정하는 민생의 핵심 축이다. 그래서 주택 정책의 실패는 민생의 실패이자 정권의 실패다.
이재명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잃어버린 신뢰 자산을 되찾는 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단,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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