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③ 29년을 기다린 우승, 그리고 다시 찾은 '염경엽의 시간'

LG트윈스 염경엽 감독 사진 김호이 기자
LG트윈스 염경엽 감독 [사진= 김호이 기자]


LG트윈스 염경엽 감독의 야구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스포츠를 좋아하던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된 야구는 처음에는 꿈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가까웠다. 아마추어 시절 팀의 리더로 활약하며 자연스럽게 중심에서 경기를 이끌었지만, 정작 그 당시에는 야구가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 무대에 올라서며 전성기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에 기회를 놓치고, 그 과정에서 큰 좌절을 마주했다. 이때부터 염 감독의 삶과 야구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32살이 넘어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죽도록 노력해야 했죠. 그 시간을 버티며 제 위치를 다시 찾았고, 결국 감독이라는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염경엽은 흔히 말하는 ‘전략가’ 이상의 모습이다. 그는 좋은 감독의 조건을 묻자 주저 없이 ‘조직 전체와 함께 성장하는 리더’라고 답했다. 선수 시절 다양한 감독을 경험했고, 외국인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관찰하며 얻은 깨달음이 지금의 철학을 만들었다.

“어떤 감독은 리더십이 뛰어났고, 어떤 감독은 인간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를 계속 공부해왔죠. 단장을 꿈꾸며 준비했던 과정도 감독으로서의 리더십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전략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염 감독의 리더십 철학의 핵심은 ‘사람’이다. 야구는 숫자와 전략으로 움직이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는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라고 강조한다.

“조직에 위기가 올 때, 결국 극복하는 힘은 사람입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 신뢰가 위기 돌파의 성공률을 결정하죠. 많은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며 확신하게 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선수들과의 신뢰는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염 감독의 대답은 단순하지만 깊었다.

“진심입니다. 진심은 위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요. 그리고 진심이란 특별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달린 거죠.”

위기 속에서 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방식도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다. 그는 팀의 고참들과 주축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감독이 앞에서 끌기보다, 선수들이 스스로 분위기를 바꾸며 위기를 넘도록 하는 방식이다.
 
염경엽 감독이 만든 메뉴얼북 사진 김호이 기자
염경엽 감독이 만든 메뉴얼북 [사진= 김호이 기자]

새벽 3시 카톡, 하루 3–4시간 수면… “감독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염 감독은 선수들 사이에서 ‘새벽 3시에도 메시지를 보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그는 웃으며 “문제가 있을 때는 더 늦게 자고, 잘 풀릴 때는 빨리 잔다”고 답했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3~4시간. 경기 전에는 30분 정도 눈을 붙이는 것이 루틴이다.

“감독의 역할은 지도보다 방향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방향을 정하려면 흔들리면 안 돼요. 그래서 원칙이 중요합니다. 원칙이 있어야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줄어들고, 문제 발생 확률도 낮아지죠.”

그는 코칭 스태프와 리더십을 공유하기 위해 직접 매뉴얼 북을 만들기도 했다. 기술적인 기준뿐 아니라 팀 운영의 원칙, 리더십 철학까지 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조직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체계는 팀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니까요.”

 
인터뷰 장면 사진 김호이 기자
인터뷰 장면 [사진= 김호이 기자]

번아웃, 건강 문제… “건강이 없으면 하고 싶은 일도 못 한다”

염경엽 감독은 한때 심각한 번아웃과 건강 문제를 겪었다. 그 시기 그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 배웠다고 말한다.

“건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루틴을 단순화했고, 시련을 무조건 실패로 보지 않는 법을 배웠어요.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에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물었을 때, 대답은 망설임 없이 ‘가족’이었다.

“현대 유니콘스 우승 피로연 때였어요. 가족이 중심이 아니라 구석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죠. 내 위치가 곧 가족의 자리라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죽기 살기로 다시 중심을 찾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선수들에게 실패를 줄여주고 싶다”

그의 철학이 담긴 책 『결국 너의 시간은 온다』는 실패 앞에서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최소한 주 1회 자신을 객관적으로 점검하라는 조언에는 염 감독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2013년 첫 감독에 취임하면서 그는 비로소 ‘염경엽의 시간’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준비해온 계획을 직접 실험하고, 실패와 성공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온 과정 때문이다.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현재가 최고의 전성기다.’ 노력과 목표 의식 없이는 발전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최대한 경험하지 않도록 그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염경엽 감독이 쓰는 화장품 사진 김호이 기자
염경엽 감독이 쓰는 화장품 [사진= 김호이 기자]

 MZ세대와의 소통, 냉철함과 따뜻함의 균형

요즘 선수들은 과거처럼 ‘시키면 한다’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염 감독은 세대가 바뀐 만큼 지도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선수들은 자발성이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걸 기반으로 노력하면 지치지 않고 성과를 내거든요. 그걸 이해하고 동기를 불어넣는 게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리더십 모델은 ‘선수 중심형 지도자지만 냉철함을 잃지 않는 지도자’다. 모든 코치와 선수가 최고로 성장할 수 있게 지원하되, 능력이 충분한 선수는 자율성을 존중하고, 부족한 부분은 분명하게 지도한다.

그리고 그가 감독으로서 가장 잘했다고 평가하는 순간은 단연 2023년 LG트윈스 우승, 29년 만의 성취였다.

“모두가 절실했습니다. 그 마음이 모여서 만든 우승이죠. 감독으로서 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염경엽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염경엽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야구를 넘어 인생으로… “결국 이겨야 할 상대는 ‘나’다”

선수 시절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묻자 그는 “생각이 바뀌면 삶의 질이 바뀐다”고 말했다. 욕심과 열정, 동료를 돕는 마음, 그리고 겸손함—이 네 가지가 그의 인생 철학을 만든다. 은퇴 후에도 이 철학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늘 이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누구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내 자신에게 이기면 모두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염경엽 감독의 야구는 기록이나 승패를 넘어 ‘사람’으로 이어져 있다. 그의 야구는 진심으로 시작해 관계를 통해 확장되고, 결국 선수와 조직 전체의 성장으로 완성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과 눈빛에는 늘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진심은 통한다. 특히 위기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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