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 통화인 엔화의 위상은 막강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엔화는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시장의 긴장감이 고조될 때마다 매수세가 몰리는 '안전 통화'로 간주되어 왔다. 일본 기업들은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엔화로 바꾸는 자금 흐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엔화는 더 이상 안전 자산은 커녕 오히려 최근에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주요국 통화 대비 가치가 하락하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14일 엔·달러 환율은 1달러=159.72~159.74엔까지 치솟으며 엔저에 좀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는 모습이다.
선진국 통화 중 가치가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하락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실제로 국제결제은행(BIS)이 산출하는 실질실효환율 기준 엔화의 구매력은 1995년 정점 대비 60%나 급락했다. 일본보다 통화 가치가 큰 폭의 하락을 기록한 국가는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튀르키예 등 신흥국뿐이다. 엔화가 사실상 선진국 통화로서의 지위를 잃고 신흥국 통화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저렴한 통화'로 전락했다는 푸념이 나오는 이유다.
엔 환율의 역사는 네 가지 변곡점을 거치며 변화해 왔다. 1973년 변동환율제 도입 당시 1달러=300엔대에서 출발한 엔화는 일본 제조업의 성장에 힘입어 점진적인 가치 상승을 기록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1985년 '플라자 합의'였다. 미국 등 주요 5개국(G5)이 달러 강세 억제에 합의하자 엔고 현상은 가속화됐다. 합의 직전 240엔대였던 환율은 1989년 120~140엔대까지 떨어졌다. 당시 미국이 일본의 경제력을 견제하기 위해 엔고를 강제했을 만큼, 엔화는 그 자체로 강력한 국력의 상징이었다.
이후 2013년 아베노믹스가 시작되면서 일본 정부는 엔고를 억제해 수출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유례없는 규모의 돈을 푸는 '초완화적 통화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환율은 100~110엔대 박스권을 형성하며 안정됐고, 시장에는 여전히 위기가 오면 100엔대 전후로 회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과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풀었던 자금을 회수하고자 금리를 가파르게 올린 반면, 일본은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양국의 금리 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졌다. 여기에 단순히 금리 차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의 엔저 현상이 고착화됐고, 2026년 현재 시장에서 '안전 자산 엔화'로의 회귀 본능은 사실상 소멸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일본 경제의 구조적 균열과 국력 저하라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무역 구조 변화다. 과거에는 엔저가 발생하면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살아나 무역 흑자가 늘고, 이것이 다시 엔화 매수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있었다. 하지만 기업들이 생산 기지를 해외로 대거 이전하면서 엔저가 수출 물량 증가로 이어지는 효과는 미미해졌다. 오히려 엔저로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 비용이 커져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고착화시키는 '부메랑'이 됐다.
여기에 이른바 '디지털 적자'라는 새로운 복병이 등장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의 클라우드 서비스나 소프트웨어 이용료로 빠져나가는 달러가 매년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일본에서 쓰는 인바운드 소비액이 2024년 기준 8조 엔을 돌파하며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지만, 거대한 디지털 적자의 구멍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해외 투자로 벌어들인 배당이나 이자 역시 일본으로 환류되지 않고 성장이 기대되는 현지에 재투자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과거처럼 위기 시에 자금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동력마저 상실됐다.
결국 일본 내에서는 엔저가 국익이라는 반세기 동안의 '사상'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이 막연히 품어왔던 '엔저는 수출에 유리하다'는 믿음은 이제 수입 물가 폭등을 통한 국부 유출을 상징하는 비극적 지표로 변모했다. 미즈호 은행의 카라카마 다이스케 수석 마켓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일본을 환율 조작 감시 대상국에서 제외한 것은 일본이 더 이상 미국을 통상적으로 위협할 수준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의 경제력을 두려워해 엔고를 강제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일본의 국력 저하가 엔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배경이 된 셈이다.
기록적인 엔저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다시 한 번 환시 개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 것인가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미일 재무장관 간의 합의 기준과 주요 7개국(G7)의 공동 보조를 고려할 때, 시장의 자율성을 해치는 대규모 개입을 반복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화살은 일본은행(BoJ)의 금리 인상뿐이다. 당초 일본은행은 경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기 위해 '완만한 금리 인상'을 예고하며 시장과 소통해 왔다. 그러나 중동 사태 발발로 인한 고유가와 엔저 가속화라는 돌발 변수가 계산기를 다시 두드리게 만들었다. 실제로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초 '7월 인상설'이 우세했던 금리 인상 시점이 '4월'로 앞당겨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엔저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분석이다.
이번 주 미국에서 미일정상회담이 개최된다. 한때 글로벌 금융시장의 '안전 자산' 엔화가 이번 정상회담을 거치며 과연 추락한 위상을 회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정상회담 결과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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