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층간소음보다 요란한 말장난…하정우 감독 '윗집 사람들'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층간소음 민원으로 시작한 대화가 어느 순간 서로의 침실과 성적 취향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예의와 호기심, 욕망이 한 식탁 위에서 뒤섞이면서 네 사람의 하룻밤은 점점 돌아가기 힘든 지점까지 밀려간다. 한정된 공간에서 오가는 이 대담한 말들의 공방은 분명 웃기고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극장을 나서는 순간 남는 건 묘한 뒷맛이다. 영화가 실제 건드린 것보다, 건드렸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정우 연출·주연작 '윗집 사람들'은 스페인 영화 '센티멘탈'을 원작으로 한 소동극이다. 매일 밤 윗집에서 들려오는 지나치게 활기찬 소리에 지친 아랫집 부부 정아(공효진 분), 현수(김동욱 분)는 층간소음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윗집 부부 김선생(하정우 분)과 그의 아내 수경(이하늬 분)을 집으로 초대한다. 권태기에 빠진 아랫집 부부와 겉으로 보기엔 금실 좋은 윗집 부부가 한 자리에 마주 앉은 저녁 식사 자리는 내내 긴장감이 맴돌고 끝내 예상치 못한 제안으로 발칵 뒤집어진다.

영화는 집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5개의 챕터로 나누어 진행한다. 하정우 특유의 말장난과 리듬감 있는 대사, 배우들 사이의 티키타카는 순간순간 웃음을 끌어낸다. 문제는 이 말맛이 영화의 대부분을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사 하나하나의 재치는 살아 있지만 그 재치가 인물의 감정이나 서사로 축적되기보다는 농담이 터졌다가 사라지는 '에피소드'에 머무는 순간이 잦다. 관객에게 남는 건 이들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감정의 흐름보다 금세 증발해버리는 말 몇 줄에 가깝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하정우 감독은 영화 '윗집 사람들'이 단순한 섹스 코미디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화자, 즉 우리와 가까운 아랫집 부부가 겪는 갈등과 봉합이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영화는 스스로 만들어온 무대 장치를 거꾸로 걷어찬다. 그동안 네 사람의 미묘한 감정선은 대부분 농담과 비유, 말장난 속에 숨어 있었지만 화해의 국면에 들어섰을 때 지금까지의 무드와 달리 수경의 상담에 의해 일괄 정리된다. 정신과 교수인 수경이 부부의 갈등을 조목조목 짚고 부부는 그 말을 따라가며 다시 끌어안는다. 말맛과 리듬으로 승부해왔던 영화가 정작 절정에서는 해설 방송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금기시되어 온 사적이고 은밀한 부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부부 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보겠다는 취지지만 말로 던지고 말로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힘을 잃는다. 갈등과 화해가 인물의 선택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누군가의 조언과 개입으로 완성되면서 이야기의 주도권도 함께 빠져나간다.

성을 다루는 방식에도 의문점이 남는다. 겉보기엔 상당히 개방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그간 한국 상업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았던 19금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어느 순간부터 성인 네 사람이 진짜 욕망을 주고받는 장이라기보다 도발적인 설정과 대사를 관객 앞에 과시하고 소비하는 수준에 머문다.

성적인 대화를 주도하는 입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도 설핏 진보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어휘가 과연 '이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화면 속 여성들은 거침없이 섹스를 이야기하고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 대사에 여성 주체의 구체적인 감각이나 경험, 관계에 대한 시선이 깊게 새겨져 있지는 않다.

경계를 넘나드는 말장난과 리듬감은 영화가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도발처럼 기능한다. 섹슈얼하지만 섹시하지는 않다. 표현 수위나 소재의 파격성에 비해 장면이 전하는 감각과 긴장은 의외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캐릭터와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욕망의 언어라기보다 섹스·진액 같은 단어를 노골적으로 던지기만 해도 섹슈얼함이 자동으로 생성될 것이라는 오래된 착각에 기대는 대목에 더 가깝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인물 구성과 상징의 층위도 장식적이다. 챕터를 나누고 그림과 삽화, 여러 은유와 상징들을 촘촘히 배치하지만 이 요소들이 결국 하나의 정서와 관점으로 수렴되지 못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는 인상이 강하다. 각 장면에 깔린 상징은 분명 많지만 인물과 서사를 밀어 올리기 위한 필수 장치라기보다 '의미가 있다'고 표시해두는 기호처럼 느껴진다. 갈등의 축이 차곡차곡 쌓여 폭발해야 할 지점에서 영화는 또 다른 농담과 상징을 쏟아내며 긴장을 분산시켜 버린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까지 버티는 데에는 배우들의 힘이 크다. 네 배우 모두 이 한정된 공간과 대사 위주의 구조를 자기 방식으로 휘저으며 균형을 맞춘다. 공효진은 낯선 제안을 앞에 둔 정아의 현실적인 리액션과 그 뒤에 숨겨진 지친 마음을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김동욱은 황당함과 분노, 서운함이 겹겹이 쌓여 폭발 직전까지 치닫는 현수의 감정을 관객이 가장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지점으로 만들어준다. 하정우는 김선생의 가벼움과 계산을 동시에 끌고 가며 장면마다 리듬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이하늬는 도발적이면서도 묘하게 초연한 수경을 통해 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기묘하게 흔들어준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윗집 사람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분명 장점들도 있다. 한국 상업영화가 좀처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던 섹슈얼한 재료를 뻔뻔하리만큼 직진하는 태도로 밀어붙이는 저돌성이다. 3전 4기만에 하정우가 감독으로서의 갈피를 잡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다만 이 영화가 끝내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그 파격이 인물과 관계의 진짜 갱신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파격적인 척'의 차원에 머물러 버렸다는 점이다. 웃음은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찜찜함이 남는 술자리의 뒷맛 같다. 3일 개봉. 러닝타임은 107분이며 관람 등급은 청소년관람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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