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장항준 감독 '왕과 사는 남자'…기록의 여백, 사람으로 채우다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쇼박스]

역사는 때로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알려준다. 단종의 삶이 그렇다. 우리는 이미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고,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대신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붙잡는다.

비극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의 나날을 바라보는 영화다. 유배지에서 만난 촌장 엄흥도와 함께한 시간, 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소년으로 존재했던 순간들. 이미 정해진 끝을 바꾸려 들기보다 그 끝을 향해 쌓여 가는 하루하루를 차분히 따라간다. 결과를 아는 이야기이기에 과정이 더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고 영화는 그 지점을 정직하게 밀어붙인다.

1457년,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어린 왕 이홍위는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길에 오른다.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는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유치하려 애쓴다. 한명회는 "누가 오든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엄흥도는 부푼 꿈으로 이를 맞이하지만 그 앞에 나타난 이는 폐위된 왕 이홍위다. 살아가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소년과 그를 감시해야 하는 촌장. 영화는 두 사람 사이의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포착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쇼박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사진=쇼박스]

장항준 감독은 권력 암투의 전면을 반복하기보다 기록의 여백으로 시선을 옮긴다. 조선왕조실록이 남긴 굵직한 사건의 줄기 사이에서 한 사람의 '시간'을 길어 올린다. 청령포는 절망의 풍경에 머물지 않고, 광천골 사람들의 얼굴과 맞닿으며 '생활의 공간'으로 치환된다. 엄흥도의 시선이 연민을 거쳐 책임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사건이 아닌 태도와 거리감의 미세한 변주로 표현된다.

다만 상징적 장치들이 서사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기보다 개별 이미지에 머무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인물들의 감정이 압축적으로 건너뛰며 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구간도 존재하지만, 영화가 끝까지 버텨내는 힘은 결국 인물들의 앙상블에서 나온다. 배우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시대의 공기를 입체적으로 빚어내며 극의 밀도를 촘촘하게 채워낸다.

유해진은 초반부터 엄흥도를 영화의 단단한 축으로 세운다. '좋은 사람'이기보다 현실적인 계산을 하던 인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정의 무게를 쌓아가는 과정을 과장 없이 설득한다. 박지훈은 이 영화가 얻은 가장 선명한 수확이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정서로 이홍위를 그려내며 텅 빈 눈빛만으로도 처연한 잔상을 남긴다. 유지태와 전미도는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잡고, 이준혁과 정진운 등은 짧은 등장만으로도 영화의 톤과 리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명확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2월 4일 극장에서 개봉하며 러닝타임은 117분, 관람 등급은 12세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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