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마르틴 루터가 훗날 종교개혁이라 불렸던 일종의 사건들을 주도한 이후 중세 종교 중심 사회의 부조리가 제거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평안을 찾고 그 사회에 평화가 찾아왔는가? 정반대였다. 변화는 고통을 동반한다. 사람들이 모순에 눈뜨게 되면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거칠게 거부했다. 농기구로 무장해서 저항했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교회였으나 이내 그들을 지배하던 영주와 제후들에게 창끝을 겨누었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치른 전쟁은 잔인했다. 130년이나 계속된 전쟁은 1648년 30년 전쟁과 함께 끝났다. 싸울 기력을 소진했을 때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달라졌다. 가장 혹독하게 전쟁을 치른 독일은 수백년간 대가를 치르며 유럽 최빈국이 되었다.
루터의 귀환과 칼슈타트의 급진 개혁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그의 주장 철회를 거부했다. 루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추방령이 내려졌으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납치해서 1년 가까이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겼다. 루터의 부재중, 동료 교수이자 동지인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1)가 과격한 개혁을 주도했다. 성상 철거, 미사 형식 파괴 등으로 혼란이 커졌다. 프리드리히 3세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했고 루터가 돌아와서 상황을 수습해 주기를 원했다.
뮌처와 농민전쟁의 폭발
칼슈타트의 급진적 논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다’거나 ‘불의한 권력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정치적인 주장으로 발전했다. 종교개혁의 언어가 계급 전복의 논리로 바뀌었다. 종교개혁에 동조했던 루터의 동지들과 농민들은 면죄부를 팔던 교회를 넘어 영주의 권위를 의심하고 봉건적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누적된 농민들의 불만을 자극한 사람은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였다. 그는 농민들의 봉기를 부추기고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뮌처는 루터의 초기 제자였으나 결별하고 가난한 농민의 편에 서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였다. 부패한 교회뿐 아니라 봉건 체제 자체를 부정했다. 농민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억압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농민전쟁이 폭력화되자 루터는 '살인적이고 약탈적인 농민 무리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질서 파괴는 신의 뜻에 반한다며 제후들에게 진압을 촉구했다. 루터는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구분했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제후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이 열어준 ‘성경, 자유, 평등’이라는 단어가 급진적 해석을 통해 사회혁명으로 전이되었다. 1524년에 뮌처는 농민군을 이끌며 정신적, 군사적 지주 역할을 했다. 뮌처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권위는 타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의 불평등한 세상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았다. “칼을 들어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라”며 무장 투쟁을 선동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뮌처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며, 불의한 통치자들은 몰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나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등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로 이어지고 해방신학의 뿌리가 되었다.
농민전쟁은 처음에는 세금 문제나 부역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되었다. 남부 독일 슈바벤 지역의 농민들은 12개 조항을 발표했다. ‘목사를 선택할 권리’, ‘빈민 구제에 십일조 사용’, ‘공유지 사용 자유’, ‘농노제 폐지’, ‘노동에 대한 대가 지불’, ‘성문법에 의한 재판’, ‘사망세 폐지’ 등을 내세웠다. 이 12개 조항은 수만 부가 넘게 인쇄되어 전 독일에 유포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다. 뮌처는 튀링겐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모든 재산은 공유되어야 하며, 불의한 통치자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농민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확신을 심었다. 전쟁 초기에 루터는 농민들의 처지와 주장에 공감하며 제후들에게 양보와 타협을 권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성과 수도원을 점령하여 파괴하고 영주들과 귀족들을 살해하자 태도를 바꿨다.
1525년 5월,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8천 명의 농민군과 제후연합군이 맞붙었다. 전투 직전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뮌처는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신 증거”라고 외쳤다. 하지만 평야에 포위된 농민군은 제후연합군의 대포 공격에 거의 전멸했다. 뮌처는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참수됐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농민들 약 30만 명 중 약 10만 명이 학살되었다. 농민전쟁의 피해는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전 독일의 1천여 개 성이 파괴되었고, 300여 개의 수도원들이 불에 탔다. 전쟁 후 농민의 처지는 더 악화됐고, 봉건적 압박은 더 심해졌다.
루터의 선택과 새로운 질서
전쟁의 결과 종교개혁의 주도권은 제후들에게 넘어갔다. 독일 개신교는 국가 교회 체제가 됐다. 루터는 민중의 급진성을 경계하며 교회 질서 확립에 집중했다. 각 교회를 방문해 실태를 조사한 후 ‘소교리문답’을 만들어 보급했다.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칠 수 있도록 쉽고 간결한 문답 형식이었다. 자유로웠던 예배 형식을 정비하고 목회자의 권위를 강조했다. 뮌처의 ‘성령 직접 계시’는 배제됐다. 종교개혁은 점차 정치 전쟁으로 확대됐다. 가톨릭 황제와 개신교 제후 연합이 충돌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됐다. 이때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뮌처의 정신은 재세례파(Anabaptists) 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를 주장한 이들은 가톨릭과 루터교 모두에게 박해 받았지만 훗날 침례교의 뿌리가 됐다.
루터는 제후들 편에 서서 온건한 노선을 택했다. 오늘날 좌파 신학자들은 루터가 뮌처와 함께 급진 개혁에 앞장서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자 프리드리히 3세가 보호한 ‘대학과 설교 중심의 개혁’이 루터에 의해 유지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농민전쟁과 함께 폭력혁명으로 취급받아 붕괴됐을 것이다. 대포를 가진 훈련된 정규군과 농기구로 무장한 농민군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농민군이 이긴다는 것은 억지 논리이다.
프리드리히의 현명함과 루터의 온건 노선 덕분에 종교개혁과 농민전쟁이 분리됐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제후들에 의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억압은 파괴해야 하므로 칼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뮌처의 주장에 맞서, “질서 붕괴는 더 큰 악이고, 복음은 폭력으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루터가 뮌처와 결별함으로써 종교개혁은 반란 아닌 교회개혁으로 살아남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진리·교육·도덕의 최종 권위였다. 국가와 대학은 자율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교회에 종속됐다. 종교개혁 이후 국가·대학·교회가 역할을 나눴다. 국가는 질서와 법을 담당하고 신앙을 강제하지 않았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와 구원을 주는 교회가 분리되었다. 교회는 정치권력과 결별하고 양심과 신앙의 공동체로 재정의됐다. 대학은 교회의 하위기관이나 국가 선전기관의 역할에서 벗어나 학문적 진리 탐구의 장으로 거듭났다. 세상은 이렇게 ‘근대’로 나아갔다.
다가오는 거대한 전쟁
독일 농민전쟁 이후, 황제와 제후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다가왔다. 프랑스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그리고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30년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는 데 필수적인가? 지금의 유럽 지도는 30년 전쟁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그 전쟁으로 만들어진 질서 속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끝)
독일이 통일되기 전 1976~1987년 동독시절 프랑켄하우젠 박물관에 만들어진 원형벽화.
농민전쟁 최후의 프랑켄하우젠 전투 모습을 그린 벽화.
이 그림에는 무지개와 전투모습과 루터와 뮌처와 이 밖에 종교개혁과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등장한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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