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한일정상회담 이야기] 셔틀외교로 자리잡은 한일, 이제는 민간 중심 경제·문화·관광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2026년 5월의 안동은 단순한 지방 도시가 아니었다. 그곳은 동북아 외교사의 새로운 상징 공간이 되었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강바람과 선유줄불놀이의 불빛 아래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단순한 정상회담 이상의 메시지를 세계에 던졌다. 그것은 한일 관계가 이제 과거의 상처와 갈등만으로 규정되는 시대를 넘어, 공동 생존과 공동 번영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는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 협력의 제도화, 둘째는 셔틀외교의 완전한 정착, 셋째는 AI·첨단기술 협력 확대, 넷째는 민간 중심의 문화·관광 공동체 가능성, 다섯째는 과거사 문제를 관리하면서 미래지향적 협력으로 나아가겠다는 현실적 공감대였다.
 
특히 이번 회담은 중동 위기와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 미·중 전략경쟁, 북·중·러 밀착이라는 거대한 국제정세 속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일 양국은 더 이상 과거의 감정만으로 외교를 운영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에너지와 공급망, AI와 안보, 금융과 기술이 하나로 연결되는 초복합 위기의 시대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강조하고, 다카이치 총리가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롭고 안전한 항행”을 언급한 장면은 단순한 외교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의 동북아와 인도·태평양 질서가 얼마나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는 현실 인식이었다.
 
지금 세계는 세 개의 거대한 전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첫 번째는 군사 전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은 이미 장기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두 번째는 기술 전쟁이다. AI와 반도체, 양자컴퓨터, 우주산업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은 사실상 새로운 냉전 구조로 가고 있다. 세 번째는 공급망 전쟁이다. LNG·원유·희토류·식량·배터리 광물 확보 경쟁이 국가 안보 자체가 된 시대다.
 
이런 시대에 한국과 일본은 서로 싸우기에는 너무 가까운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배터리, 조선과 첨단 제조업에 강점이 있다. 일본은 소재·부품·장비와 정밀기계, 기초과학과 금융 시스템에 강하다. 양국은 경쟁 관계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 관계다. 어느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한쪽도 심각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원유·LNG 스와프’ 논의다. 이것은 단순한 에너지 거래가 아니다. 사실상 한일 에너지 안보 공동체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LNG 저장 능력과 전략 비축 체계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정유·석유화학·조선 인프라를 갖고 있다. 양국이 에너지 공동 비축 체계와 긴급 스와프 체계를 제도화한다면, 중동발 충격을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이번 회담은 단순한 양자 외교를 넘어 새로운 아시아 공급망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다카이치 총리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원 공급망 협력”을 제안한 것은 매우 전략적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일본·아세안·인도·호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경제 안보 네트워크 구상을 내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리더십은 과거보다 약화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철저히 자국 우선주의에 기초해 움직인다.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고 있고,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이 서로 등을 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양국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회담은 그런 점에서 ‘생존의 외교’에 가까웠다. 과거의 한일정상회담이 역사 문제와 감정 충돌 속에서 냉온탕을 반복했다면, 이번 회담은 공급망·에너지·AI·안보라는 현실의 언어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지역 외교’다. 서울과 도쿄 중심이던 외교가 나라현과 안동으로 확장됐다는 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다. 이는 수도 중심 외교에서 지역·문화·생활 외교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양국 간 연간 인적 교류는 이미 1300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젊은 세대는 상대 국가를 더 이상 적대국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여행과 콘텐츠, 취업과 창업, 문화와 관광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K팝과 일본 애니메이션, 한국 드라마와 일본 온천 문화는 충돌보다 융합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제 한일 관계는 정부 중심 외교를 넘어 민간 중심의 경제·문화·관광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예컨대 부산·후쿠오카·오사카·제주를 연결하는 동북아 관광 벨트, AI 스타트업 공동 펀드, 청년 교환 창업 프로그램, 한일 공동 반도체 대학원, 공동 우주개발 프로젝트 등은 충분히 현실 가능한 의제다. 유럽이 전쟁의 역사를 넘어 EU를 만들었듯이, 동북아 역시 작은 경제·문화 공동체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번 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AI 협력을 강조한 점도 중요하다. AI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경쟁력과 문명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기술이다. 미국은 플랫폼과 자본을 장악하고 있고, 중국은 시장 규모와 제조업 기반을 장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기술·문화·정밀 제조·콘텐츠를 결합한 새로운 동북아 AI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와 일본의 소재·장비·기초기술이 결합된다면 충분히 세계적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특히 AI 시대에는 개인정보 보호와 디지털 윤리, 초국가 스캠 범죄 대응 같은 새로운 공동 규범도 중요해진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 경찰청 간 스캠 범죄 대응 협력이 논의된 것도 그런 흐름의 일부다.
 
그러나 현실의 걸림돌도 여전히 크다. 역사 문제는 가장 민감한 화약고다.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는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일본 내 우익 정치 세력의 역사 수정주의 역시 여전히 심각하다. 한국 내부에서도 반일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흐름이 반복된다.
 
하지만 이제 양국은 감정의 정치에서 생존의 정치로 이동해야 한다. 역사를 잊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공자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와, 중국 외교의 오래된 원칙인 구동존이(求同存異), 곧 같은 점은 찾고 다른 점은 남겨둔 채 협력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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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도 냉정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모두 때로는 일본 문제를 국내 정치의 도구로 활용해 왔다. 보수는 안보를 이유로 역사 문제를 지나치게 덮으려 했고, 진보는 역사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화한 측면이 있었다. 이제는 보다 성숙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첫째, 역사 문제는 원칙 있게 대응하되 감정 선동으로 흐르지 말아야 한다. 둘째, 경제·과학·기술 협력은 미래세대의 생존 문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셋째, 청년 세대 교류를 국가 전략 수준으로 확대해야 한다. 넷째, 지방정부와 민간기업 중심의 실질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AI 시대의 공동 규범과 개인정보 보호 협력을 제도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국 국민의 인식 변화다. 정치 지도자들의 정상회담만으로는 한일 관계의 미래를 완성할 수 없다. 국민의 일상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쌓여야 한다. 관광과 음식, 예술과 스포츠, 청년 교류와 학술 협력이야말로 장기적으로 가장 강력한 평화의 토대가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 한일 관계의 미래는 경제와 안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두 나라의 깊은 정신문화와 오랜 역사 속 대화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일본에는 신토(神道)의 전통이 있다. 신토는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경전처럼 하나의 절대 경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종교라기보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그리고 축문인 ‘노리토(祝詞)’를 통해 일본인의 자연관과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 온 오래된 정신문화다. 자연과 조상, 지역 공동체를 중시하는 신토의 세계관은 오늘날 일본 문화의 깊은 바탕이 되고 있다.
 
한국에는 ‘천부경(天符經)’의 정신세계가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유는 한국인의 생명관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홍익인간 정신과 연결돼 있다. 일본의 신토가 자연과 공동체의 조화를 강조해 왔다면, 한국의 천부경은 인간과 우주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상생해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두 나라의 정신문화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며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는 깊은 대화의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한일 양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충돌만 했던 것이 아니다. 백제와 왜(倭)의 교류, 불교와 문자, 건축과 공예, 도자기와 음악, 근대 이후 산업과 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는 서로에게 상처도 주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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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필요한 것은 과거를 지우는 망각이 아니다. 과거를 바로 보되 미래를 함께 여는 성숙한 대화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역사에만 갇혀서도 안 된다. 일본은 신토의 자연 존중과 공동체 정신을, 한국은 천부경의 조화와 홍익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 위에서 양국은 AI와 반도체, 에너지와 공급망, 문화와 관광, 청년 교류와 지방 외교를 함께 키워가야 한다. 이번 안동 회담은 그래서 단순한 정상회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한일 양국이 과거의 감정에서 미래의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의 줄불놀이는 강 위에 불꽃을 흩뿌린다. 불꽃은 잠시 흩어지는 듯하지만 결국 강물 위에서 다시 이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한일 관계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갈등과 상처로 흔들렸지만, 지리와 역사와 경제와 문화는 결국 두 나라를 다시 만나게 만들고 있다.
 
한일 양국은 이제 과거의 적대적 기억만 붙들고 있기에는 국제질서의 변화가 너무 거세다. 미·중 패권 경쟁과 AI 혁명,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전쟁의 시대 속에서 양국은 선택해야 한다. 과거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공동 설계할 것인가.
 
이번 안동 회담은 그 질문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셔틀외교는 이제 단순한 외교 형식이 아니라 동북아 공동 번영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 정부가 아니라 민간, 갈등이 아니라 미래세대가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일 새 시대의 진정한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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