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중동 위기에 손 잡은 한일…공급망 전쟁이 시작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안동 정상회담은 한일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과거사와 안보 갈등이라는 오래된 현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양국이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를 중심으로 협력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중동 정세 불안과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LNG와 원유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다.
 

30년 통상 현장의 경험으로 보면 이번 회담의 핵심은 ‘관계 개선’보다 ‘협력의 성격 변화’에 있다. 과거 한일 경제협력은 무역과 투자,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의 협력은 단순한 교역 확대가 아니다. 미·중 전략경쟁, 중동 위기, 에너지 가격 불안,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전개되면서 양국은 서로의 리스크를 함께 관리해야 하는 경제안보 파트너가 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 한 호텔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 한 호텔에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가장 현실적인 의제는 에너지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중동산 원유에 크게 의존한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전략적 통로로 평가된다. 이곳이 흔들리면 유가와 물류비, 환율, 물가가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제조업 비중이 큰 한국과 일본에는 에너지 충격이 곧 산업 경쟁력 충격으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양국이 LNG 수급 협력과 원유 수급·비축 정보 공유를 강화하기로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지난 3월 체결된 LNG 수급협력 협약서를 토대로 협력을 확대하고, 원유 분야에서도 정보 공유와 소통 채널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위기 대응 체계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수급 불안이 발생했을 때 공동 대응이 가능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관건이다.


공급망 협력 역시 중요하다. 양국은 지난 3월 체결한 한일 공급망 파트너십의 성과를 평가하고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는 단순한 경제협력이 아니다. 공급망은 이제 국가안보의 핵심 인프라가 됐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광물, 에너지, 물류는 어느 한 나라가 독자적으로 완결하기 어렵다. 한국의 제조 경쟁력과 일본의 소재·장비 기술은 경쟁 관계이면서도 상호 보완 관계다. 이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실용외교가 출발한다.


다만 협력이 곧 낙관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일 관계에는 여전히 과거사라는 민감한 변수가 있다. 조세이 탄광 유해 DNA 감정처럼 인도주의적 협력이 시작되는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국민 감정은 정상 간 만남만으로 단기간에 회복되지 않는다. 경제안보 협력을 확대하되, 역사 문제에 대한 원칙과 피해자 존중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번 발표에서 ‘비핵화’ 표현이 부각되지 않은 점도 신중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곧바로 대북정책의 중대한 변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존을 강조하는 정부의 기조 속에서 한미일 안보 공조와 어떻게 균형을 맞출지는 앞으로 중요한 외교 과제가 될 것이다.


결국 이번 회담은 감정외교가 아니라 실용외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공급망과 에너지는 이념이나 감정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국익은 선언이 아니라 구조로 지켜진다. 한일 양국은 역사적으로 갈등해 왔지만, 경제안보 측면에서는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이웃이다.


중요한 것은 후속 실행이다. LNG와 원유 협력이 실제 위기 때 작동할 수 있는지, 공급망 파트너십이 기업 현장의 안정성으로 이어지는지, 양국 협력이 정권 변화나 국내 정치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제도로 자리 잡는지가 성패를 가른다.


세계는 이미 신통상 냉전의 시대로 들어섰다. 보호무역, 공급망 블록화, 에너지 무기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냉정한 국익 계산과 정교한 협력 구조다. 이번 안동 회담이 한일 양국이 감정을 넘어 실리를 관리하고, 실리를 넘어 전략을 설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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