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에는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네팔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어느 날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학생과 이야기 중에 자신과 비슷한 외모의 학생들이 지나가자, 그 유학생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네팔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필자의 눈에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말이다. 모두 비슷한 남아시아 출신 학생들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눈에 인도인인지, 네팔인인지, 파키스탄인인지, 방글라데시인인지 구별한다. 언어와 억양, 복장, 행동 방식, 표정과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차이를 읽어내고 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한국인, 중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구분하듯 그들 역시,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 내부의 차이를 정확하게 인식한다. 오히려 그 순간 필자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역과 국가를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잘 모르는 지역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이해하려 한다. 남아시아 사람들을 모두 비슷하게 보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스탄’ 국가라고 부르며, 아프리카를 하나의 문화권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언론 역시 흔히 이들을 하나의 집단처럼 묶어 설명한다. 물론 그렇게 볼만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들 국가는 과거 구소련의 통치를 받았고, 러시아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해 왔다.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며 ‘플로프’라는 볶음밥 형태의 음식을 즐겨 먹는다.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학생들을 만나고 지도해 보면 이러한 단순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금세 알게 된다. 언어도 다르다.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는 투르크계 언어에 속하지만, 타지크어는 페르시아어 계통이다.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이해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접근법이다. 한자 문화권이라는 이유로, 젓가락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유교 전통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한국, 중국, 일본을 별 차이 없는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동아시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 중국의 정치 문화, 일본의 사회구조와 가치관은 서로 다르다. 언어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며 인간관계와 상관습(商慣習)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다른 나라를 바라볼 때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국제사회와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최근 스타벅스 탱크 논란은 글로벌 시대에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특정한 단어와 이미지가 어떤 사회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표현일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역사적 비극과 정치적 기억을 건드리는 상징이 될 수 있다. 탱크라는 단어 하나가 상품명으로는 중립적일 수 있어도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은 단순히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언어 뒤에 존재하는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또한 최근 제기된 인도 통역 문제는 언어와 문화 전문가가 단순한 학문 분야가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우리는 흔히 인도를 하나의 국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도는 하나의 국가인 동시에 수많은 언어와 민족, 문화가 공존하는 거대한 문명권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인도인이라면 모두 힌디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인도는 그렇지 않다. 인도 헌법이 인정하는 공용언어만 해도 22개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힌디어, 벵골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펀자브어, 우르두어, 아삼어, 오디아어,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수백 개의 지역 언어와 방언이 사용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언어가 단순한 방언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북인도의 힌디어와 벵골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반면, 남인도의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한다. 언어 체계 자체가 다르며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정체성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타밀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 전통을 가진 언어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타밀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강한 자부심의 대상으로 인식하며, 자신들을 단순히 힌디어 사용자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는 시각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인도는 하나의 국가이지만 하나의 언어권은 아니다. 오히려 인도의 경우, 마치 유럽연합(EU)을 구성하는 다양한 국가들에 견줄 만큼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복합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현실에 가깝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Tagore)가 쓴 ‘기탄잘리(Gitanjali)’는 원래는 벵골어 작품이었다. 그가 직접 영어로 번역한 판본이 영국 문단에 소개되면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인도가 세계에 배출한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조차 힌디어 작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인도를 하나의 언어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접근인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 과정에서는 힌디어 전문 통역 인력 부족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상외교 과정에서 힌디어를 직접 한국어로 통역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힌디어에서 영어로, 다시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기는 이중통역(二重通譯) 방식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14억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국가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전문 인력이 부족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제기하였고, 외교부는 정상외교 통역을 전담하는 통역실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자 글로벌 중견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이 이제서야 정상외교 통역 인프라의 중요성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시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번 논의가 일회성 대책으로 끝나지 않고 힌디어, 타밀어, 페르시아어, 중앙아시아 언어, 스와힐리어 등 전략 언어 전문가와 지역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국가적 투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 경쟁력은 단순히 기술력이나 자본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상대 국가의 역사와 문화, 언어와 종교, 생활방식과 상관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외교의 성패가 갈리고 투자와 무역의 결과가 달라진다. 특히 상관습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어떤 국가는 계약서보다 인간관계를 우선시한다. 어떤 국가는 모든 사항을 문서로 남겨야 신뢰한다. 어떤 국가는 신속한 의사결정을 선호하지만, 어떤 국가는 충분한 협의와 합의를 중시한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자본을 보유하고 있어도 국제사회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언어와 문화 전문가의 역할이 축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정보보안 분야만 보더라도 가장 위험한 공격은 첨단 해킹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사회공학적 공격이 가장 치명적이다. 아무리 완벽한 보안시스템과 암호화 기술을 구축해도 사람을 속이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진다. 결국 가장 디지털적인 시스템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인간이다.
국제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간 갈등도, 외교적 오해도, 협상 실패도 대부분 문화와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인공지능은 문장을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자존심을 번역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은 단어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기억과 종교적 상징, 문화적 함의(含意)까지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더욱 중요해진다. 인공지능이 정보를 처리할수록 인간은 맥락을 읽어야 한다. 기계가 번역할수록 인간은 문화를 해석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이 연결을 담당할수록 인간은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K-팝과 K-드라마가 세계적 성공을 거둔 이유도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가장 한국답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또 하나의 명제를 덧붙여야 할 때가 되었다. 가장 아날로그한 것이 가장 디지털적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적 사고와 통찰력이다. 과거 유럽 열강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군대만 보낸 것이 아니었다. 선교사와 탐험가, 언어학자와 지리학자를 함께 보냈다. 그들은 현지 언어와 문화, 종교와 관습을 연구하고 기록했으며, 이러한 지식은 외교와 통상, 국가 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물론 오늘날의 시각에서 당시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지식이 곧 국력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역시 이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세계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세계에 대한 이해 역시 깊어져야 한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는 세계를 상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전문가와 언어전문가의 전략적 육성이 필요하다. 특히 중앙아시아 언어, 힌디어, 타밀어, 벵골어, 스와힐리어, 페르시아어와 같은 특수언어, 소수언어 전문가와 해당 지역의 역사, 종교, 문화, 상관습을 깊이 이해하는 지역전문가의 양성은 더 이상 학문적 관심사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필요성과 현실이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 많은 대학에서는 학령인구 감소와 취업률 중심의 대학 평가, 재정 압박 등을 이유로 소수언어 및 비인기 어문계열 학과들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학과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대학 조직 하나가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해당 언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축적해 온 전문 인력과 지식 체계가 함께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특정 언어와 특정 지역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학문 활동이 아니다. 외교와 통상, 국가안보와 국제 협력, 해외시장 진출을 뒷받침하는 전략 인프라이다. 한 사람의 지역전문가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친 언어 습득과 현지 연구, 문화 이해의 축적 과정이 필요하다.
인재는 위기가 닥친 뒤에 양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오기 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외교부의 통역실 신설 추진은 이러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책은 통역 인력 몇 명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연구기관과 정부가 함께 장기적인 관점에서 언어 전문가와 지역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국가 전략을 마련하는 데 있다.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듯, 언어와 문화 전문가 역시 국가 전략 인재로 육성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 역시 효율성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다. 전국의 읍·면 단위에도 파출소와 소방서, 보건지소가 존재한다. 이용자가 적다고 해서 이를 폐지하지는 않는다.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기반 시설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와 지역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해당 언어권과 지역문화에 대한 연구는 외교와 통상, 국가안보와 국제 협력, 해외시장 진출을 뒷받침하는 전략 인프라이다. 실제로 주요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언어와 지역 전문성을 국가 역량의 일부로 관리해 왔다. 미국은 국무부 내 ‘언어서비스국(Office of Language Services)’을 통해 정상회담 통역과 외교 문서 번역을 상시 수행하고 있다. 언어와 통역은 단순한 행정 지원 기능이 아니라 외교력과 국가 경쟁력을 구성하는 핵심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다.
돈을 쓰는 외국어는 쉽다. 번역 앱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러나 돈을 버는 외국어는 어렵다. 상대방의 언어와 문화, 역사와 가치관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국 기계가 번역한 문장보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 기술이 거래를 연결할 수는 있지만 신뢰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AI 시대에도 언어와 문화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의 깊이일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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