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기본·원칙·상식] 수출 1000억 달러 시대, 17년 만의 고환율을 경계한다

 
추락하는 엔화에 요동치는 원화…환율 장중 1560원도 위협
추락하는 엔화에 요동치는 원화…환율 장중 1,560원도 위협

한국 수출이 사상 처음 월 1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독일·중국·미국에 이어 세계 네 번째 기록이라고 한다. 인구 5000만 명 남짓한 나라가 제조업과 기술력으로 세계 무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쓴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성취다. 반도체를 비롯한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다시 확인됐고, 인공지능 투자 확대라는 글로벌 흐름도 한국 기업들에 기회로 작용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월 수출 1000억 달러 돌파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환호만 하기에는 한국 경제의 표정이 밝지 않다. 같은 시기 원·달러 환율은 1550원 안팎까지 치솟으며 17년여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수출은 사상 최대인데 통화가치는 금융위기 때 수준으로 밀려난 셈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 경제의 두 얼굴이다. 겉으로는 수출 호황이지만, 안으로는 원화 약세와 금융시장 불안, 수입물가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고환율은 수출기업에 일시적 호재가 될 수 있다. 달러로 번 돈을 원화로 환산하면 매출이 늘고 가격 경쟁력도 높아진다. 그러나 지금의 환율 상승을 단순한 수출 지원 효과로만 볼 수는 없다. 에너지와 원자재, 식료품을 상당 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에서 고환율은 곧 비용 상승이다. 기업의 생산비가 오르고, 물가는 다시 자극받으며, 가계의 실질소득은 줄어든다. 외화부채가 있는 기업의 상환 부담도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수출 호황의 구조다. 월 1000억 달러 돌파의 상당 부분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기대고 있다. 반도체가 한국 경제의 핵심 산업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특정 품목과 특정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는 언제든 약점으로 바뀔 수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 미·중 갈등, 기술 패권 경쟁, 공급망 재편이 겹치면 오늘의 호황은 내일의 변동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 수출 숫자가 커졌다고 경제 체질까지 단단해졌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환율 급등은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경상수지가 개선되고 수출이 늘어도 원화가 약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시장은 한국 경제의 성장 지속성이나 정책 신뢰를 충분히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가계부채, 부동산 금융, 재정 부담, 정치 불확실성, 산업 쏠림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환율은 한 나라 경제에 대한 종합 성적표다.

정부는 수출 1000억 달러 돌파를 홍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축이 아니라 관리다. 외환시장 변동성이 과도하게 커질 경우 적시에 안정 조치를 취하되, 인위적 환율 방어에만 매달려서도 안 된다. 시장이 믿을 수 있는 재정·통화정책 조합, 물가 안정 의지, 외환 유동성 관리가 함께 가야 한다. 중소 수출기업과 원자재 수입기업은 환율 변동에 특히 취약한 만큼 환헤지 지원도 촘촘히 해야 한다.

산업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반도체 호황에 기대 수출 실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배터리, 바이오, 방산, 조선, 인공지능, 콘텐츠, 서비스 수출까지 기반을 넓혀야 한다. 수출 대국의 위상은 한두 품목의 대박이 아니라 넓고 질긴 산업 생태계에서 나온다.

월 수출 1000억 달러는 한국 경제가 아직 강하다는 증거다. 동시에 17년 만의 고환율은 그 강함이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음이다. 수출은 사상 최대인데 국민은 물가와 환율을 걱정하는 경제라면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부와 기업은 기록에 취할 때가 아니다. 수출의 양적 성취를 경제 체질 개선과 통화 안정, 국민 생활의 안정으로 연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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