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엄마와 딸, 그 영원한 애증에 대해 -영화 '딸에 대하여'

  • "그래도 괜찮아" 그 한 마디를 하지 못해서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영화 ‘딸의 대하여’의 포스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내가 널 이해할 수 있을까?” 그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간극과 아쉬움, 어려움이 존재한다. 때로 가족은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타인이다. 영화 속 엄마와 딸의 관계처럼 말이다. 영화는 사랑과 애증, 연민, 미움 그 어디 쯤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딸 그린(임세미)이 자신의 동성 연인인 레인(하윤경)과 함께 그린의 엄마(오민애)의 집으로 들어오며 시작된다. 그린의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치매 노인의 식사를 챙기고 몸을 닦아주며 하루 대부분을 타인을 돌보는 데 보낸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삶은 고단하다. 그런 그녀의 집에서 딸과 딸의 연인이 함께 살게 되면서 익숙했던 일상이 흔들린다.
 
엄마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음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음처럼 취급한다. 분명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 글자처럼 이들의 관계를 명명하지 않는다. 딸의 애인인 레인을 딸의 친구처럼 대하고 불편함을 숨진 채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쓴다. 영화는 이 침묵을 혐오로 그리진 않는다. 오히려 엄마는 딸을 사랑하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혐오를 감싸 안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엔 답하기 어렵다. 엄마는 ‘나의 딸’이기 때문에 혐오 대신 ‘낯섦’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딸의 삶을 이해하는 언어를 갖지 못했다. 성소수자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며 부조리에 맞서는 딸은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자신과는 정반대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엄마가 요양원에서는 가족이 없는 치매 노인 재희를 향해 세심한 돌봄을 보여주지만 정작 자신의 딸 앞에서는 마음을 열지 못한다는 점이다. 생경한 느낌을 주는 가족보다 어쩌면 연민을 느끼는 타인이 더 가까워 보일 정도다.
 
그린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지만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혔다는 이유로 해고된 동료 강사를 감싸며 함께 대학을 향해 부당함을 외친다. 그린은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외친다. 그의 곁에는 레인이 있다. 오래된 애인이자 그린의 모든 것을 지지해주는 정신적 지주이자 가족. 그런 레인을 엄마는 인정하지 않고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이는 딸을 딸 자신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린은 엄마에게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만, 매번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왔다. 그린이 진짜 원했던 것은 그저 엄마가 자신의 사랑을 부끄러운 것이 아닌 딸의 삶의 일부로 인정해주기를 바란 것일지 모른다. “왜 그런 삶을 사느냐”는 질문 대신 “그 사람이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엄마를 기다렸을 것이다.

반면 엄마는 딸과 사회의 부딪힘을 봤기에 더욱 불안하다. ‘우리 딸도 나중에 혼자 살게 될까’ 싶어 레인에게 헤어짐을 권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마는 그린의 부상 소식에 다급히 찾은 병실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해고된 강사의 어머니를 마주한다고 무언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영화 후반부 세 사람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돌보던 치매 노인 재희(허진)에게 후원이 끊겼다는 이유로 전원을 보낸 요양병원의 행태에 분노한 엄마는 재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게 된다. 모두들 말한다. 가족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엄마에게 재희가 각별했던 이유는 딸이 떠올라서였기 때문이다. 딸이 나중에 남편도 아이도 아무런 연고 없이 외롭게 소외당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또한 혈연이나 법으로 묶인 가족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 대한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재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옴으로써 딸의 미래에도 자신과 같은 따뜻함을 나눌 타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정성껏 재희를 돌보고 그 여정에 그린과 레인도 동참한다. 네 명이 한 집에 살게 되면서 손길을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천천히 변화한다.
 
재희를 돌보는 데 집중하는 이들의 모습에선 협동심마저 느껴진다. 누군가 밥을 자리면 누군가 재희를 깨워 앉히고 엄마가 밥을 떠먹인다. 레인이 빵을 굽고 재희를 깨워 모두 함께 나눠 먹는 식이다. 레인과 말도 섞지 않았던 엄마는 이 과정을 통해 레인의 사려깊음과 인간다움을 마주하고, 딸에게 묵묵한 지지를 보내는 레인의 존재를 다시금 느낀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성소수자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 영화가 묻는 것은 훨씬 보편적인 사회 현상들이다. 하루하루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 세대 간 충돌, 늘어가는 노인 인구, 장년 세대의 사회적 박탈감, 사회적 변화를 쫓아 오지 못하는 가치관 등 우리 주변의 산적한 문제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사회적 문제를 당장 바꿀 순 없지만 스스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적인 문제를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없다 해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잠재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변화는 이러한 노력과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믿고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성큼 우리 앞에 와 있을 것이다.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사진=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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