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북극항로와 울산항·上] 북극 뱃길 현실로… 부산·울산·영일만항, 각자의 '관문 전략'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세계 해운 지도가 움직이고 있다. 정부는 북극항로를 새로운 국가 성장축으로 정하고 시범운항과 특별법 제정, 거점항만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부산항과 울산항, 포항 영일만항도 저마다 북극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본보는 두 차례에 걸쳐 북극항로가 국내 항만 지형에 가져올 변화와 울산항이 확보해야 할 경쟁력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울산항 전경 사진울산항만공사
울산항 전경. [사진=울산항만공사]


북극항로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지도 위에만 존재하는 뱃길이 아니게 됐다.

8월 22일 부산신항을 출발하는 2758TEU급 컨테이너선 '팬스타 아크로호'는 러시아 북쪽의 북동항로를 거쳐 영국 펠릭스토우와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그단스크로 향한다. 국내 선박의 북극항로 시범운항은 2016년 이후 10년 만이며, 컨테이너선이 투입되는 것은 처음이다.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 북동항로를 이용하면 운항거리는 약 1만 3000㎞다.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기존 항로 약 2만㎞보다 35%가량 짧다.


단순히 거리가 줄어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에즈운하와 홍해 등 기존 해상물류망의 지정학적 위험이 커질 때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급망이 생긴다는 점에서 북극항로의 전략적 가치는 더 크다.

정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지난 6월 16일 공포된 '북극항로 활용 촉진 및 연관산업 육성에 관한 특별법'은 오는 12월 17일 시행된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북극항로위원회를 두고 5년 단위 기본계획과 실행계획을 수립하며, 연구개발과 전문인력 양성, 관련 사업자에 대한 재정·금융지원 등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

해양수산부는 현재 북극항로위원회 운영 방식과 북극항로종합지원센터 지정 기준 등을 담은 시행령 제정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북극항로 시대의 항만 역할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해수부가 하반기 정책 방향에서 제시한 구상은 비교적 선명하다. 부산항은 '컨테이너', 울산항은 '에너지'를 중심으로 북극물류의 핵심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부산항, 세계적 환적 경쟁력 앞세워 '시·종착점' 노린다


가장 앞서 움직이는 곳은 부산항이다.

부산항은 지난 해 2488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이 가운데 환적화물은 약 1410만TEU에 달한다. 거대한 글로벌 선사 네트워크와 환적 물량, 촘촘한 정기항로가 부산항의 가장 큰 자산이다.

이번 정부 시범운항의 출발지가 부산이라는 점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부산항만공사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극지연구소,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등과 '친환경 북극항로 포럼'을 이어가며 부산항을 친환경·저탄소 북극항로의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한 전략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부산시도 시범운항 선사인 팬스타와 협약을 맺고 운항 과정에서 확보되는 항로 여건과 화물 운송, 선박 운항 정보를 공유해 향후 부산의 역할과 지원체계를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부산항에도 숙제가 있다.

북극항로를 오가는 미래 선박이 LNG와 메탄올, 암모니아 등 친환경 연료로 빠르게 전환될 경우 대규모 벙커링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송상근 부산항만공사 사장은 올해 해수부 업무보고에서 "부산항에서도 이러한 선박의 벙커링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며 "2030년 운영을 목표로 사업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울산항, 컨테이너 대신 '에너지'…이미 북극 선박이 찾고 있다


울산항의 전략은 부산과 다르다.

세계적인 컨테이너 환적항인 부산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기보다 울산이 이미 가진 에너지 산업과 액체화물 처리 역량을 북극항로와 연결하는 전략이다.

울산항은 국내 최대 액체화물 항만이다. 올해 6월 전체 물동량 1527만톤 가운데 액체화물이 1193만톤으로 약 78%를 차지했다.

항만에는 액체화물을 처리하는 35개 부두와 5기의 부이, 67개 선석이 구축돼 있다. 상업용 탱크터미널만 802기, 저장용량은 454만㎘를 웃돈다. 정유·석유화학산업과 대규모 저장시설, 하역·배관 인프라가 항만 배후에 집적돼 있다는 점은 울산만의 강점이다.

무엇보다 실제 북극항로 운항선박의 기항 경험이 있다.

울산항은 최근 10년 동안 북동항로 5회, 북서항로 13회 등 모두 18차례 북극항로 운항선박이 기항해 국내 항만 가운데 가장 많은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일에는 북서항로 상업화물 운송 경험이 풍부한 네덜란드 해운사 로열 바겐보그와 한국해양진흥공사, 울산항만공사가 3자 협약을 체결했다.

로열 바겐보그는 지난해 기준 북서항로 상업화물 운송 48회의 실적을 가진 선사다. 세 기관은 북극항로 운항 선박의 울산항 기항과 친환경 연료 공급 확대, 운항 정보와 경험 공유, 국내 북극항로 운항 매뉴얼 구축, 한국·북미 잠재화물 발굴 등에 협력하기로 했다.

올해 최대 4척의 북극항로 통과 선박이 울산항에 기항해 연료 공급과 화물 하역을 할 예정이다.

정부가 북동항로뿐 아니라 한국과 북미 동부를 잇는 북서항로 활용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울산항에는 또 다른 기회다. 울산에서 캐나다 퀘벡까지 북서항로를 이용할 경우 운항거리는 약 1만3500㎞로, 파나마운하를 경유할 때보다 약 35% 짧아진다.

변재영 울산항만공사 사장은 이번 협약에 대해 "정부 북극항로 정책 이행을 위한 실질적 기반이 될 것"이라며 "국내 해운업계의 북극 운항 역량을 높이고 항만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영일만항, '북방경제 특화항' 승부…포항도 속도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포항 영일만항도 있다.

경북도와 포항시는 부산과 울산에 비해 항만 규모는 작지만 북극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 철강과 이차전지 산업, 항만 인입철도를 묶어 '북극항로 특화항만'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영일만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6만 2310TEU로 전년보다 2.7% 증가했다. 항만 인입철도 운행도 주 10회에서 15회로 늘었다.

현재 약 67만㎡ 규모의 1단계 항만배후단지가 조성돼 있으며, 추가 배후단지와 항만시설 확충도 추진되고 있다.

포항시는 영일만항 확장개발 기본구상과 북극항로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 한편 원양항로 개설과 화주 대상 포트세일즈에도 나서고 있다.

경북도 역시 북극항로를 계기로 영일만항을 북방경제권의 벌크화물과 에너지 물류를 담당하는 동해안 거점항으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항시의회에서는 실제 유럽으로 운항할 선사와 화주, 물동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극항로 사업에 과도한 행정력과 예산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미래 항로를 준비하는 것과 실제 수익을 내는 항만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포항에만 해당되는 지적은 아니다.
 

'짧은 항로=싼 항로' 아니다…북극의 최대 변수는 경제성


북극항로는 지도상 거리가 짧다고 곧바로 경제적인 항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해수부 역시 북극항로의 본격적인 상업화에 앞서 항로 데이터와 운항 경험, 전문인력 확보와 함께 안정적인 화물 수요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 연안을 통과하는 북동항로의 경우 러시아 당국의 사전 승인과 쇄빙 지원 문제가 있고,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 역시 상업운항의 핵심 변수다. 최근에는 국내 북극항로 시범운항을 둘러싸고 서방 일각에서 러시아와의 협력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겨울철 결빙과 높은 보험료, 내빙선박 확보 비용, 쇄빙 지원료까지 감안하면 단순한 거리 단축만으로 경제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정부가 이번 시범운항을 곧바로 '정기항로 개설'로 연결하기보다 운항 경험과 항로·물류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우선 의미를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부산과 울산, 영일만항의 경쟁도 '북극항로 거점'이라는 이름을 먼저 붙이는 데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부산에는 세계적인 컨테이너·환적 네트워크가 있고, 울산에는 에너지와 선박연료 공급망이 있다. 영일만항은 철강·이차전지 산업과 북방물류를 결합하려 한다.

세 항만이 가진 자산도, 노리는 시장도 서로 다르다.

북극항로 시대의 항만 경쟁은 이제 시작됐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북극항로 거점항'이라는 간판을 먼저 다느냐가 아니라, 북극을 오가는 배와 화물이 실제로 그 항만을 찾아야 할 이유를 누가 먼저 만들어 내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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