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처음 맡아보는 희망의 냄새, '짜장면'의 기적

“토익이 700밖에 안 되네?” “회사는 왜 그만두셨어요?”
“회사가 구조조정, 부도가 나가지고... 죄송해요”

죄송한 나머지 ‘남자 김씨(정재영)’는 대출을 받았다. '희망을 놓지 말자, 대출을 받자'고 광고하는 대부업체는 ‘남자 김씨’에게 대출 원금 7500만원이 2억1030만8000원으로 불어났다고 친절한 설명을 전한다. 업체의 상세한 설명에 용기가 생긴 ‘남자 김씨’는 한강물에 과감히 본인의 몸을 던졌다. 그러나 죽지 못한 그는 뜻밖에도 밤섬에 표류하게 된다.

수영을 전혀 할 수 없는 ‘남자 김씨’, 배터리 잔량이 거의 없는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봤지만 ‘한강 무인도에 갇혔다’는 그의 구조 메시지는 실없는 장난으로 취급 받는다. 그는 정말로 서울 한강 한가운데 무인도에 표류하고 말았다.
 

“달을 찍는 이유는 달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 않으니까요”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메뉴로 끼니를 때우고 하루 만보를 꼭 채워 걷는 것으로 체력관리도 나름 철저하게 하는 ‘여자 김씨(정려원)’는 3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다. 달 사진 찍기, 미니홈피 관리하기가 그녀의 유일한 취미생활. 그녀의 방은 한강변 아파트에 있었고, 성능 좋은 렌즈를 통해 창문 밖 세상을 구경하던 어느 날 ‘여자 김씨’의 눈에 ‘남자 김씨’, 아니 외계생물체의 모습이 들어온다.

‘여자 김씨’는 밤섬에서 1인 라이프를 나름 잘 꾸려가고 있는 ‘남자 김씨’의 행적을 한동안 관찰하다가 어느 날 큰 결심을 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에 헬멧을 쓰고 한강 다리까지 나가서 편지가 든 와인병을 밤섬 숲으로 던진 것이다. 편지 속 메시지는 “HELLO”.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시네마서비스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시네마서비스]

우주에서 떨어뜨린 깃털이 지구 땅 위 어딘가에 세워놓은 바늘에 꽂힐 확률. 이 계산도 안되는 엄청난 확률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기적처럼 맺어진다. 우리가 살면서 스치는 수많은 인연이 모두 그렇다. 그런데 하물며 무인도에 갇힌 남자와 자신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 여자가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채무액을 확인하고 비로소 용기를 내 한강에 몸을 던진 ‘남자 김씨’는 더럽기 짝이 없는 밤섬에 걸쳐졌다.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서 한때 탈출을 꿈꾸기도 했으나 그거라고 될 리가 있나. 그런데 어쩌다 획득한 ‘짜파게티’ 스프 1개에 각성한 그는 6개월여 동안 무인도(밤섬)에서 처절한 생존의 여정을 겪어낸다.
 
이렇게 해서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의 혹독한 여정을 의미심장하게 관찰하기 시작했고 ‘여자 김씨’가 첫 인사를 담은 와인병을 마침내 힘껏 던짐으로써 ‘남자 김씨’를 향해 깃털 하나를 떨어뜨렸다. 각 김씨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인연의 끈 하나를 부여잡게 되었다.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공식예고편 캡처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공식예고편 캡처]

그러나 그 인연의 끈은 고작 ‘HELLO’니, ‘FINE THANK YOU’니 같은 딱딱한 몇마디 인사말(그나마 한글이 아니고 영어로 쓴다)로 위태롭게 유지된다. 멀쩡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그들은 이미 절망에 익숙해졌고 혼자 있는 것에 잘 적응했다.
 

“누군지 모르고 있을 때 그때가 그냥 딱 좋은 거다. 누군지 그게 뭐가 중요해?”

 
섣불리 다가서길 망설이는 두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건 바로 ‘짜장면’이다. 그렇게 먹고 싶어했던 ‘남자 김씨’를 위해 ‘여자 김씨’는 온갖 종류의 짜장면을 밤섬으로 배달시켜준다. 오리배를 타고 밤섬까지 찾아온 자랑스러운 대한의 배달맨이 갖다 준 짜장면들. ‘남자 김씨’는 그 맛있는 것들을 다 마다하고 스스로 키운 옥수수로 면을 만들었다. 몇 개월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키워낸 옥수수였다.
 
되돌아온 짜장면과 함께 배달맨이 ‘여자 김씨’에게 전해준 ‘남자 김씨’의 메시지. “나한테 짜장면은 희망입니다”. 그 말에 불어터진 짜장면을 먹고 힘을 낸 ‘여자 김씨’는 옥수수를 키워보기로 한다. 희망의 옥수수.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시네마서비스
영화 '김씨 표류기' [사진=시네마서비스]
 
‘처음 맡아보는 희망의 냄새’, 짜장면은 표류 중인 이 두 김씨에게 등대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류기가 종지부를 찍는 지점은 이들이 통성명을 하는 순간이다.
 

“My name is 김정연”. “Who are you?”

 
그 많은 망설임과 두려움, 절망을 이기고 죽는 것보다 더한 용기를 가진 후에야 이뤄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인연을 맺는 건,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조우하는 것 같은 정도로 놀랍고 조심스러우며 두렵고 신비로운 순간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기적 같은 순간을 이렇게나 사랑스럽게 담은 이 영화는 ‘김씨 표류기’다.
 
제목 : 김씨 표류기(2009.5.14. 개봉)
감독 : 이해준
출연 : 정재영, 정려원
OTT : 왓챠, 웨이브, 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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