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AI 시대 최태원 회장의 진짜 성적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오랫동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삼성이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전자산업을 앞세운 삼성은 한국 제조업의 상징이자 수출경제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이 산업과 국가경쟁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한국 재계의 지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생겼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 SK그룹과 최태원 회장이 있다.
SK의 규모가 삼성보다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AI시대에는 기업의 영향력을 결정하는 기준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매출, 자산, 수출, 고용이 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잣대였다. 지금은 여기에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통신과 에너지, 글로벌 기술동맹과 공급망을 얼마나 연결할 수 있느냐가 추가됐다.

이 기준으로 보면 SK는 흥미로운 위치에 서 있다. SK는 AI·반도체·에너지·라이프사이언스 등에 걸쳐 180개가 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기술과 자본, 전문인력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구조다. AI시대의 SK를 단순한 ‘재벌그룹’이라는 전통적인 틀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한국의 핵심 산업 인프라와 세계 AI 생태계를 연결하는 ‘전략 플랫폼 기업집단’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과 다른 길에서 만난 AI

SK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려면 삼성과의 차이를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삼성은 메모리뿐 아니라 파운드리, 시스템반도체를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기업이면서 스마트폰과 가전 등 세계적인 완제품 사업까지 가지고 있다. SK의 구조는 다르다. SK하이닉스의 메모리, SK텔레콤의 통신과 AI, 여기에 에너지 사업 등이 주요 축을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차이가 AI시대에는 SK의 강점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AI산업을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으로 그려보자. 최첨단 AI 모델을 구동하려면 GPU가 필요하고, GPU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내려면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공급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이 필요하다. 수많은 AI 반도체를 연결하려면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며, 이를 움직이려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초고속 통신망이 있어야 한다. ‘반도체→AI 컴퓨팅→데이터센터→통신→에너지’. 놀랍게도 SK가 가진 사업 포트폴리오는 이 AI 가치사슬과 상당 부분 겹친다.

그 중심에는 SK하이닉스가 있다. SK하이닉스는 AI용 HBM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고 엔비디아는 핵심 고객이다. AI 붐 이전까지만 해도 메모리는 경기변동이 심한 범용 반도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생성형 AI의 폭발적인 확산은 그 위상을 바꾸었다. HBM은 이제 AI 컴퓨팅의 성능을 좌우하는 전략부품이 됐다. AI 혁명이 SK를 세계 AI 공급망의 중심부로 끌어올린 것이다.
 
HBM에서 ‘AI Factory’로

더 주목할 것은 SK가 HBM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HBM을 잘 만들어 공급하는 데 그친다면 SK는 세계적인 반도체기업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SK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보다 훨씬 크다. SK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메모리와 GPU를 결합한 차세대 AI 데이터센터, 이른바 ‘AI Factory’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 이어 일본에서도 2028~2029년을 목표로 AI 특화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사업모델의 중요한 진화다. HBM이라는 AI의 핵심 부품을 파는 기업에서 AI 자체가 생산되는 인프라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기업으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SK하이닉스가 AI의 핵심 메모리를 담당하고 SK텔레콤이 통신과 AI 인프라를 확장하며 그룹의 에너지 역량이 이를 뒷받침한다면 SK는 개별 사업의 집합을 넘어 하나의 AI 인프라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SK는 세계 최대급 반도체 생산거점 건설을 추진하면서 기존 계획보다 완공 시기를 크게 앞당기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AI시대 한국 재계의 새로운 역할이 드러난다. 정부는 AI산업 육성정책을 만들고 인프라를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HBM 공장을 짓고, 수십조 원의 위험자본을 투입하고, 글로벌 빅테크와 기술협상을 벌이며 공급망을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는 결국 기업이다.AI시대에는 기업의 전략적 투자 결정 자체가 국가 산업정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산업을 넘어 거시경제에서 SK의 역활 

SK의 역할은 산업을 넘어 거시경제 영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예탁증서(ADR) 상장을 통해 대규모 달러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국내 공장 건설 등의 투자에 활용하기 위해 원화로 전환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대규모 달러 매도와 원화 매수가 외환시장에 영향을 주면서 다른 수출기업들의 해외자금 국내 환류 움직임까지 자극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물론 원화 환율을 한 기업이 좌우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금리와 경상수지, 글로벌 달러 흐름, 외국인 자금과 정부정책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변화가 숨어 있다.

과거 우리는 대기업을 주로 수출과 고용의 주체로 생각했다. 이제 세계적 규모의 기업은 해외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이를 국내에 투자하고, 외화를 환류시키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한다. 그 과정에서 금융시장과 환율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국가의 거시경제 안정능력과 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

SK의 최근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최태원 회장의 역할을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SK그룹 회장인 동시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다. 따라서 그의 말과 행동은 이미 한 기업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 한국 재계 전체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이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사실상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하는 ‘한일 경제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양국이 하나의 시장을 만들고 경제규칙을 만드는 주체가 돼야 하며 AI와 데이터센터, 에너지, 공급망 같은 전략 분야에서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업인의 언어와는 조금 다르다. 보통 기업인은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말한다. 최 회장은 한 단계 위에서 “어떤 경제권을 만들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SK하이닉스와 일본 키옥시아의 공동생산과 연구개발, 공급망 공유, 나아가 공동공장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세계 공급망의 블록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상당히 전략적인 접근이다. 한국 혼자서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한 AI 생태계에 맞서기는 어렵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의 메모리·통신·제조역량과 일본의 소재·장비·로봇·정밀제조 역량이 결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최태원 회장의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은 단순한 한일관계 개선론이라기보다 AI시대의 산업지정학 구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CEO를 넘어 ‘민간 전략가’로

여기서 AI시대 기업인의 역할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CEO가 기업경영자(Manager)였다면 글로벌화 시대의 CEO는 투자자(Investor)이자 네트워크 구축자(Network Builder)가 됐다. 그리고 AI와 기술패권의 시대에는 여기에 민간 전략가(Private Strategist)라는 역할이 추가되고 있다.최태원 회장의 최근 행보가 흥미로운 것도 이 세 번째 영역이다. 그는 글로벌 테크기업들과 협력하는 동시에 일본 경제계와 대화하고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면서 정부 간 외교만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경제협력의 접점을 기업 차원에서 넓혀가고 있다. 최 회장이 이끄는 최종현 학술원 등을 통해 한미일 국제대화와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것도 이러한 흐름과 연결된다 이를 과거의 ‘민간외교’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늘날 경제안보에서는 반도체 공급망과 AI 데이터센터, 에너지망과 기술표준이 전통적인 외교만큼 중요해졌다. 글로벌 기업인은 때로 국가 정상보다 더 자주 세계적인 기술기업 CEO를 만나고 실제 투자와 공급계약을 결정한다. AI시대의 민간외교는 친선을 만드는 외교에서 기술·자본·시장·공급망을 연결하는 경제안보 외교로 진화하고 있다.
 
‘SK의 회장’과 ‘재계의 회장’은 달라야 

바로 이 지점에서 최태원 회장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생긴다. 한국 재계의 대표 조직은 오랫동안 전국경제인연합회였다. 전경련은 산업화와 고도성장 과정에서 대기업의 목소리를 정부와 사회에 전달하는 사실상의 재계 대표 창구였다. 지금은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최근 재계의 대외적인 대표 역할에서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존재감이 크게 높아졌다. 대한상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위상도 그만큼 달라졌다. 그가 해외에서 한일 경제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정부와 산업정책을 논의하며 한국 기업을 대표해 국제무대에 설 때 그는 더 이상 SK의 이해만 대변해서는 안 된다. 삼성과 현대차, LG와 포스코 같은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스타트업까지 폭넓게 바라보아야 한다.따라서 앞으로 최태원 리더십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기준은 ‘포용의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재계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업마다 이해관계와 전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기업의 목소리를 듣고 공통분모를 찾아 정부와 사회, 해외에 전달하는 능력이다.특히 AI 전환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격차가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대기업만 AI 생산성을 높이고 중소기업이 뒤처진다면 한국 경제 전체의 AI 전환은 성공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SK가 AI시대의 선도기업이라면 최태원 회장은 AI시대 한국 재계 전체의 동반성장을 고민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SK 회장 최태원’과 ‘대한상의 회장 최태원’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SK의 시대’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평가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AI 투자 붐이 언제까지 현재의 속도로 지속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메모리산업은 본질적으로 사이클 산업이며 중국 기업들의 추격도 거세다. 데이터센터에는 천문학적인 자본뿐 아니라 전력과 용수, 부지까지 필요하다.중국 기업의 부상과 AI 투자 둔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속도만을 좇기보다는 시장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유연한 투자전략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SK의 여러 사업을 실제 하나의 AI 생태계로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느냐이다. 반도체가 강하다고 데이터센터 사업에서 자동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통신회사를 가지고 있다고 세계적인 AI 플랫폼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에너지 사업이 있다고 데이터센터의 전력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SK의 최대 강점인 포트폴리오가 잘못하면 최대 약점인 복잡성으로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최태원 회장의 경영 능력을 판단하는 앞으로의 중요한 기준은 ‘얼마나 많은 사업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사업들을 얼마나 하나의 AI 가치사슬로 통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느냐가 될 것이다. 

AI시대, 재계의 역할

SK의 변화는 결국 한국 재계 전체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AI시대에 대기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미래의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장기 위험을 지고 미래산업에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둘째, 기술의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 HBM처럼 아직 시장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을 때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먼저 베팅해야 한다. 셋째, 산업생태계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한 기업의 성공을 넘어 소재·부품·장비기업과 스타트업, 대학과 연구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구축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AI 기술과 일본의 제조생태계, 한국의 반도체와 산업역량을 연결해 한국이 세계 AI 공급망에서 빠질 수 없는 국가가 되도록 해야 한다.마지막으로 ‘국가의 민간 전략자산’이 되어야 한다. 정부가 하기 어려운 경제외교와 기술동맹의 공간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보면 최태원 회장은 한국 재계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
 
최태원의 진짜 성적표

그렇다고 지금 최태원 회장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 AI 호황기에 투자하는 것과 AI산업의 장기적인 승자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정한 경영능력은 AI 사이클이 흔들릴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막대한 투자를 재무적으로 감당하면서 기술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 HBM의 성공을 차세대 기술로 이어갈 수 있는가. SK의 다양한 사업을 하나의 AI 생태계로 묶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의 이익과 한국 경제의 장기적인 이익을 얼마나 일치시킬 수 있는가. 여기에 이제 하나의 질문을 더해야 한다. SK의 성공을 넘어 한국 재계 전체의 성공을 이끄는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최태원 회장의 최종적인 성적표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만큼은 이미 분명하다. 20세기 한국에서 대기업의 국가적 역할이 ‘얼마나 많이 만들어 세계에 파느냐’였다면 AI시대에는 ‘세계의 기술·자본·데이터·에너지·인재의 흐름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을 한국을 통과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SK와 최태원 회장의 행보는 한 기업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AI시대 한국 재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의 성공 여부는 SK만의 문제가 아니다.한국이 AI시대에 단순한 제조강국을 넘어 세계 AI 생태계의 ‘필수 경유지’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필자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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