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환의 교육&시선] '수요자 중심 혁명' 앞에 선 대학

  • 학생이 대학을 '간택'하는 시대, 상아탑의 생존법

<교육&시선>은 무너져가는 공교육의 현장, 학령인구 감소, 요동치는 대입 제도 속에 초중등·고등교육의 이슈를 진단하고, 당면한 교육 현안·과제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짚어봅니다. 또 한편으론 지속 가능한 대안을 탐색합니다. 때로는 우리 사회에 대한 냉철하지만 따뜻한 시선도 담겠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80회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80회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26년 9월, 15년간 애플을 이끌어온 ‘공급망 관리(SCM)의 대가’ 팀 쿡(Timothy Donald Cook)의 뒤를 이어 엔지니어 출신 존 터너스(John Ternus)가 신임 CEO 자리에 올랐다. 글로벌 빅테크의 사령탑 교체는 전 세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급자 중심의 효율과 관리 역량을 넘어, 철저히 수요자 경험과 제품의 본원적 가치 혁신으로 승부하지 않으면 초일류 기업조차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수요자 중심 패러다임 전환’의 거센 바람은 비단 실리콘밸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견고한 상아탑에 안주하던 글로벌 고등교육 생태계 역시 거대한 지각변동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 미국 대학가에서 불고 있는 이른바 ‘직접입학(Direct Admissions)’이 대학 입시의 흐름을 크게 바꾸고 있다.

학생이 입학지원서와 에세이, 각종 추천서를 들고 대학의 문을 두드리던 입시 문법이 180도 뒤집혔다. 학생이 공통 플랫폼에 고교 성적 등 기본 데이터만 올려두면, 대학이 자체 기준에 맞춰 지원서를 내지도 않은 학생에게 먼저 “당신을 우리 학교에 합격자로 모시겠다”며 공식 합격증을 발송하는 방식이다. 전미대학입학상담협회(NACAC)에 따르면, 올해 160개 이상의 미국 유수 대학이 이 시스템에 뛰어들었다. 학생이 대학에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학생에게 지원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 대학들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파격적인 ‘선(先)합격 러브콜’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학령인구 급감이라는 인구 절벽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제 학생 유치는 정적인 심사가 아니라 고도의 타깃 마케팅이자 데이터 매칭 서비스가 됐다.

바다 건너 다른 교육 선진국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 20여 년 전 학령인구 절벽을 마주한 일본은 사립대의 절반 가까이가 정원 미달을 겪으며 전통적 지필고사 중심 입시를 사실상 해체했다. 학생의 잠재력과 학업 의지를 다각도로 살피는 ‘종합형 선발(구 AO 입시)’ 비중을 60% 안팎까지 끌어올렸고, 지자체 및 지역 산업체와 연계한 ‘학습자 맞춤형 정주 프로그램’을 앞세워 수험생을 찾아 나섰다. 영국 역시 공통지원처(UCAS)를 중심으로 정원 미달 정시 매칭 시스템인 ‘클리어링(Clearing)’을 고도화하는 한편, 소외계층 인재를 대학이 선제적으로 발굴해 완화된 기준의 조건부 합격을 제시하는 ‘맥락 입학제(Contextual Admissions)’를 적극 가동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교육계의 실험은 벚꽃 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며 깊은 한숨만 내쉬고 있는 한국 대학들에 위기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수시와 정시라는 경직된 틀 안에서 복잡한 전형 요강을 만들어두고 학생들에게 ‘알아서 서류를 갖춰 문을 두드리라’며 공급자 위주의 높은 문턱을 고수하던 시절은 이미 저물고 있다. 생존 경쟁에 나선 해외 대학들은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 대학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대학 입학의 미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우선 입학의 문턱을 파괴하는 ‘데이터 기반 선제적 매칭’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고교학점제와 연계해 학생의 학습 궤적과 역량 데이터를 공유받고, 대학이 적합한 학생에게 먼저 다가가 진로와 장학 혜택, 전공 설계를 제안하는 유연한 입학 통로를 열어야 한다.

나아가 대학 적응과 학업 지속부터 전공역량 강화, 진로 설계, 취업·창업, 지역사회 참여까지 학생의 성장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는 지원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대학은 ‘입학’을 넘어 ‘등록’과 ‘학업 완성’을 이끄는 실질적 교육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현지에서도 ‘직접입학(Direct Admissions)’으로 수많은 합격증을 보내지만 비싼 학비와 졸업 후 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최종 등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한국 대학 역시 단순히 지원 문턱만 낮추는 꼼수로는 생존할 수 없다. 학과 간 벽을 과감히 허무는 융합 전공제, 산업체 수요와 직결된 마이크로디그리, 학생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산학 연계형 장학 모델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러한 체질 개선은 비단 국내 학령인구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국내 수험생 유치 경쟁에 매몰된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글로벌 인재 허브’로 도약해야 할 때다. 국경을 넘나드는 교육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대학은 지역을 불문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외 선진 대학들은 이미 국경을 지우고 전 세계 유학생을 상대로 디지털 사전 매칭과 온라인 예비 과정을 제공하며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 한국 대학들도 단순 정원 채우기식 유학생 유치가 아니라, 비자 지원부터 정주형 취업 교육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정교한 유학생 생태계를 완성해야만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내는 자 흥한다’라는 오랜 격언이 있다. 고등교육의 권위는 까다로운 전형 장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생에게 어떤 성장과 미래를 선물할 수 있는가에서 증명된다. 학령인구 급감과 장기적인 재정 위기 속에서 한국 대학들은 전례 없는 대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학생이 오기를 기다리던 ‘선발자’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 인재를 모셔오고 끝까지 책임지는 ‘성장 파트너’로 탈바꿈할 때, 비로소 우리 대학의 찬란한 봄날도 다시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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