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앞세워 군사분계선(MDL) 일대에 장벽과 철책을 세우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국경 요새화를 강화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추진해 온 비무장지대(DMZ) 평화사업은 예산 축소와 대규모 불용이 겹치며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아주경제가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인한 통일부의 ‘2025년도 DMZ 평화적 이용 사업 결산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관련 예산 61억4000만원 가운데 실제 집행액은 18억3900만원에 그쳤다. 나머지 43억100만원이 불용돼 불용률은 70.0%를 기록했다. 관련 예산은 2022년 266억9800만원에서 2023년 120억2700만원, 2024년 94억800만원, 지난해 61억4000만원으로 3년 만에 77.0% 감소했다. 예산을 2022년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였는데도 남은 예산의 70%를 쓰지 못한 것이다.
불용액 대부분은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에서 발생했다. 지난해 전체 예산의 56.0%인 34억3700만원이 배정됐지만 한 푼도 집행되지 않았다. 이 사업에서 발생한 전체 불용액의 79.9%를 차지했다. 통일부는 결산자료에 “북한 측 호응이 없어 사업에 착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판문점 견학 통합운영 사업도 예산 21억3800만원 가운데 13억2800만원만 집행됐다. 2023년 12월 이후 중단됐던 견학이 지난해 5월 제한적으로 재개됐지만 연간 22회, 341명에 그친 영향이다.
정부가 운영 중인 일부 시설도 유엔사의 출입·관리 권한 주장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유엔사는 지난 3월 역사관 부지 일부가 남방한계선 북쪽에 걸쳐 있다며 사전 출입 승인을 요구했고, 4월에는 방문 인원 제한과 폐쇄회로(CC)TV·펜스 설치 등을 추가로 요청했다.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 역사관은 이미 지난해 예산 8200만원 가운데 6100만원을 집행해 25.6%가 불용됐다. 올해 들어 출입·운영 조건이 추가된 만큼 정상적인 시설 운영과 예산 집행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전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종합 국정감사에서 해당 역사관에 대해 “연간 4000∼5000명이 이용하는 비군사 시설”이라며 “유엔사와 국방부가 긴밀히 협의하고 통일부도 참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도 구체적인 출입·운영 절차를 놓고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 통일부의 설명이다.
화살머리고지 평화사업도 시설을 만들고도 활용하지 못한 사례다. 정부는 DMZ 내 감시초소(GP)를 전시·추모 공간인 현장기념관으로 개조했지만 도로 접근성과 유엔사 출입 승인 문제로 현재까지 정상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 DMZ 밖에 도서관·기록관·박물관을 조성하려던 2단계 평화기념관 사업도 철원군이 관리 부담 등을 이유로 포기하면서 2022년 설계비 12억원이 전액 불용됐다. 통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2023년 이후 화살머리고지 관련 후속사업은 사실상 중단됐으며 현재 별도 예산도 반영돼 있지 않다.
현장 접근이 막히면서 DMZ 내부 산림·생태·문화유산 조사와 ‘사라진 마을’ 연구도 2024년부터 중단된 상태다. 파주·철원·고성의 ‘DMZ 평화의 길’ 내부 구간 역시 2024년 4월 이후 문을 열지 못했다. 통일부가 올해 재개방을 추진했지만 유엔사는 기존 출입 정책과 절차에 변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통일부는 DMZ의 평화적 이용을 비롯한 현안을 다루는 범정부 협의체에는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우리 군과 유엔사가 서로 다르게 적용하는 MDL 기준선을 일치시키고자 운영 중인 별도 협의에는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
MDL 기준과 남방한계선 적용 방식은 시설의 관할권뿐 아니라 접경사업의 출입·운영 범위까지 좌우하지만, 정작 사업 주무부처는 핵심 논의에서 빠져 있는 셈이다. 통일부 일각에서도 범정부 협의체 참여에 머무르지 말고 MDL 기준과 DMZ 출입·관리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접경사업이 장기간 중단되면 그동안 축적한 생태·문화유산 자료와 평화관광 기반이 함께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더라도 현장 경험을 갖춘 인력과 사업 기반이 사라지면 재개에 더 큰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황호섭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사무국장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DMZ 내부에서 실질적으로 진행된 통일 관련 사업의 여건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며 “안보관광에 활용되던 일부 지역마저 출입이 점차 통제되면서 접근이 어려워지고 있는 점도 향후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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