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와이드 사설] 애플도 거절당하는 반도체 시대, 한국은 무엇으로 승부할 것인가

  • 중국 CXMT와 애플의 메모리 공급 협상 논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권력 이동을 경고한다

  • HBM에 집중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범용 D램의 미래까지 지켜야 한다

  •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공급망 분절 속에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10년을 설계할 때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권력 지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거대한 구매자가 가격을 결정하고 공급자는 주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이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고대역폭메모리(HBM)에 생산 역량이 집중되면서 시장의 힘은 점차 공급자에게 이동하고 있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 기업 가운데 하나인 애플조차 메모리 조달에서 과거와 같은 절대적 협상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가 애플의 공급 요청을 거절했다는 보도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10월 27일 발표한 분석에서 애플이 가격 할인과 장기계약 등을 제시했지만 CXMT가 중국 내수 고객의 주문 증가와 공급 여력 부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로이터
[사진=연합뉴스/로이터]

다만 이 사안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애플과 CXMT의 협상 조건, 지분 투자 제안 여부, 실제 거절 경위는 양측의 공식 발표와 독립적인 교차 검증이 필요한 사안이다. 일부 보도만으로 애플이 공식적으로 공급을 거절당했다고 단정하거나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지배자가 바뀌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그럼에도 이 논란이 던지는 경제적·산업적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중국 반도체 기업이 글로벌 최대 고객의 주문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면, 한국의 반도체 전략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반도체 시장의 힘은 구매자에서 공급자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전형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수요가 늘어나면 생산설비 투자가 확대되고, 공급이 넘치면 가격이 폭락한다. 가격 하락은 다시 투자 축소를 부르고, 공급 부족이 발생하면 가격이 급등한다. 수십 년 동안 메모리 산업을 지배해 온 이른바 실리콘 사이클이다.

그런데 AI 혁명은 이 오래된 순환에 새로운 변수를 추가했다. 과거 메모리 수요의 중심이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이었다면, 이제는 AI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서버가 시장의 투자 방향을 좌우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를 비롯한 AI 가속기 기업들이 요구하는 HBM은 높은 기술적 진입장벽과 복잡한 생산공정, 까다로운 고객 인증을 필요로 한다. 메모리 제조업체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HBM과 서버용 고성능 D램에 생산능력을 우선 배분하려 한다. 그 결과 스마트폰과 PC에 사용되는 범용 메모리의 공급 확대는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경제적 역설이 발생한다. PC와 스마트폰의 판매가 둔화하더라도 메모리 가격은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수요 전체가 증가해서가 아니라 생산능력의 배분 구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교차점에서 결정된다. 다만 이제는 전체 반도체 생산량보다 어느 제품에 얼마만큼의 생산능력을 배정하느냐가 가격 결정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애플처럼 거대한 구매자도 공급자를 무조건 압박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대량 구매가 가격 인하의 무기였다면, 공급 부족 국면에서는 장기 구매 약정과 안정적인 협력 관계가 물량 확보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공급자 우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메모리 산업의 역사는 호황기에 형성된 과도한 자신감이 불황기에 얼마나 큰 손실로 돌아오는지를 반복해서 증명했다. 지금의 공급 부족을 영구적인 구조로 오판하는 순간 다음 공급 과잉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다.
 
둘째, 중국 CXMT의 부상은 단순한 저가 경쟁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이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CXMT의 성장 방식이다. 중국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선진국의 기술과 장비에 의존하면서 가격 경쟁력으로 시장에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의 수출통제와 첨단 반도체 장비 접근 제한은 중국 기업들의 전략을 바꾸어 놓았다.

외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기 전에 거대한 중국 내수시장을 기술 개발과 생산 확대의 기반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에는 화웨이, 샤오미, 레노버를 비롯한 전자제품 제조업체와 대규모 서버·클라우드 수요 기업들이 존재한다. 이들 기업이 자국 반도체 공급망을 확대하면 CXMT와 같은 기업은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부터 일정 규모의 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변화다. 과거 후발 반도체 기업은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고객을 확보하지 못해 생산 규모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중국 기업은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기술 검증과 생산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정부의 산업정책, 금융 지원, 구매기업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까지 결합하면 후발주자의 추격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물론 중국의 기술 자립이 곧 한국과 미국의 기술 우위를 넘어섰다는 의미는 아니다. 첨단 공정의 수율, 생산원가, 장비 접근성, 제품 신뢰성, 고성능 메모리의 고객 인증에서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장벽이 존재한다.

특히 특정 스마트폰에 차세대 메모리가 공급됐다는 주장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양산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기술 시연과 시제품 공급, 대규모 상업 생산은 엄연히 다르다.

그렇지만 중국의 추격을 기술적 열세라는 이유만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중국의 경쟁력은 단순히 반도체 한 개의 성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반도체를 구매하고 사용하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에서 나온다.

한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 기업 한 곳의 성장보다 중국 안에서 설계·생산·구매·소비가 연결되는 독자적인 반도체 경제권의 형성이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 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의 삼성전자 부스에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4E7세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 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의 삼성전자 부스에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인 HBM4E(7세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셋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의 성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지금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산업을 이끌어 온 핵심 기업이다. 특히 SK하이닉스의 HBM 경쟁력은 한국 반도체 기술의 위상을 다시 한번 높였다. 삼성전자 역시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반도체를 아우르는 폭넓은 사업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경쟁력이 미래의 지배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실적이 나쁠 때가 아니라 실적이 너무 좋아 경쟁 환경의 변화를 보지 못할 때다.

HBM은 분명 AI 시대의 핵심 제품이다. 그러나 모든 메모리가 HBM이 될 수는 없다. AI 서버에는 HBM뿐 아니라 대용량 서버 D램과 저장장치가 필요하고, 스마트폰·자동차·산업용 로봇·가전제품에도 다양한 종류의 메모리가 사용된다.

특히 앞으로 확대될 피지컬 AI 시대에는 로봇과 자율주행차, 스마트공장, 의료기기 등에서 저전력·고신뢰성·실시간 데이터 처리가 가능한 메모리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한국 기업이 HBM에 집중하는 동안 범용 D램과 저전력 모바일 메모리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이 고객 기반을 넓힌다면 장기적으로 시장 지배력이 약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두 개의 전략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하나는 HBM과 차세대 고성능 메모리에서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범용 메모리와 특수 목적 메모리에서 원가·품질·공급 안정성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HBM의 기술 경쟁력과 고객 신뢰를 높이는 동시에 파운드리와 메모리 사업의 시너지를 강화해야 한다. SK하이닉스는 HBM에서 확보한 경쟁우위를 다음 세대 제품으로 연결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두 기업 모두 설비투자 규모보다 투자수익률과 고객 구조, 제품별 장기 수익성을 중시해야 한다. 매출액이 많고 영업이익이 높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경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투자한 자본이 경기 하강기에도 충분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진정한 경쟁력이다.
 
넷째, 미·중 반도체 전쟁은 기술 경쟁을 넘어 시장을 둘로 나누고 있다.
CXMT의 성장을 단순히 중국 기업의 약진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반도체 패권 경쟁이 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자국 기업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목표가 첨단 기술의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는 데 있다면 중국의 목표는 외부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 자립 기반을 확보하는 데 있다.

이 경쟁에서 한국은 가장 어려운 위치에 놓여 있다. 미국은 핵심 안보 동맹이자 반도체 기술과 장비, AI 산업의 중요한 시장이다. 중국은 거대한 반도체 수요처이면서 동시에 빠르게 성장하는 경쟁자다.

미국과의 기술 협력을 포기할 수도 없고,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양국 사이에서 무원칙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도 없다.

한국의 선택은 명확해야 한다. 첨단 기술과 안보 분야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통상과 산업 분야에서는 기업의 정당한 시장 접근과 공급망 안정성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무엇보다 반도체 정책을 외교적 수사의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는 국가안보의 핵심 자산이면서 국민의 일자리와 수출, 국가 재정을 지탱하는 산업이다. 외교는 산업을 보호해야 하고, 산업은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

최근의 움직임은 중국의 기술 추격을 더욱 엄중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로이터통신은 10월 28일 CXMT가 낮은 생산수율에도 불구하고 첨단 HBM3E의 제한적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CXMT의 수율은 20~30% 수준으로, 약 70%로 거론된 SK하이닉스와 여전히 상당한 차이가 있다. 중국의 추격이 현실인 동시에 첨단 양산 경쟁력에서는 격차가 남아 있다는 의미다. 

기술 격차는 지켜야 하지만 경쟁자의 한계를 영구적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기술 장벽이 내일의 시장 장벽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섯째, 반도체 초호황과 주가 하락의 역설을 직시해야 한다.
메모리 기업의 영업실적이 개선되는데도 주가는 하락할 수 있다. 주식시장은 오늘의 이익보다 내일의 이익을 먼저 평가하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경계하는 것은 단순한 실적 악화가 아니다. 높은 이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증설 경쟁이 다시 공급 과잉을 초래하지 않을지, 중국 기업의 추격이 기존 기업의 가격 결정력을 얼마나 약화시킬지가 핵심이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전병서 박사의 분석에 등장하는 메모리 3사의 주가 40~50% 급락이라는 수치는 기준 고점과 비교 시점, 통화 기준을 명시해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개별 종목의 낙폭을 산업 전체의 공통 현상으로 일반화해서도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주가의 낙폭보다 기업가치의 변화다. 주가가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반드시 저평가된 것은 아니며,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고 반드시 고평가된 것도 아니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이 강조해 온 원칙도 결국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에 있다. 시장의 단기적인 흥분이나 공포보다 장기적인 현금창출 능력과 경영의 질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HBM의 높은 수익성이 얼마나 지속될지, 범용 D램 가격 상승이 실제 현금흐름으로 얼마나 연결될지, 막대한 설비투자가 미래의 생산성과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를 따져야 한다.

기업 경영진은 호황기에 자본 배분의 원칙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설비투자와 연구개발, 재무건전성, 주주환원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증설도, 단기 주가 부양만을 위한 과도한 주주환원도 바람직하지 않다.

반도체 산업에서 최고의 경영자는 가장 많이 투자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시점에 가장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는 사람이다.
 
여섯째, 대한민국은 반도체 강국을 넘어 AI 산업 생태계의 주도국이 돼야 한다.
한국의 반도체 정책은 지금까지 생산시설과 수출 실적, 기술 개발에 지나치게 집중해 왔다. 물론 이들 요소는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반도체를 누가 만들고 얼마나 많이 수출하느냐뿐 아니라, 그 반도체를 활용해 어떤 산업과 서비스를 창출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

AI 시대의 경쟁은 반도체 공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AI 모델, 산업용 소프트웨어, 로봇, 자동차, 의료, 국방, 에너지까지 연결된다.

특히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의 발전은 메모리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에이전틱 AI가 인간의 지시를 넘어 복잡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수행한다면, 피지컬 AI는 그 지능을 현실 세계의 기계와 로봇에 구현한다.

이러한 기술이 확산되면 반도체는 데이터센터에만 필요한 부품이 아니라 산업현장과 일상생활 곳곳에 필요한 지능의 기반이 된다.

한국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반도체 제조 경쟁력에 자동차와 조선, 기계, 배터리, 통신, 의료기술을 결합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정부는 반도체와 AI를 분리된 산업정책으로 다루지 말고 국가 차원의 통합 전략으로 추진해야 한다. 반도체 기업과 AI 개발기업, 제조업체와 대학, 연구기관이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경기 용인과 평택, 이천의 반도체 생산기지뿐 아니라 전국의 산업단지와 연구거점이 새로운 AI 산업혁명의 주체가 돼야 한다. 전북의 피지컬 AI 산업 구상 역시 이러한 국가적 전략 속에서 검토할 가치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전문인력, 교통망, 연구개발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 막대한 보조금을 약속하는 것만으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과 AI 기업을 육성할 수는 없다.

기업이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책무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 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 SK하이닉스 부스에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 HBM4E7세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 28회 반도체대전(SEDEX 2026) SK하이닉스 부스에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 HBM4E(7세대)가 전시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곱째, 반도체 산업의 최종 경쟁력은 사람과 미래에 대한 투자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미국이 메모리 산업을 개척했고 일본이 한때 세계시장을 지배했으며, 이후 한국이 기술과 생산 경쟁력으로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제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과 국가적 자원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분명하다. 기술의 우위는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러나 혁신의 출발점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데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공정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는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

한국은 반도체 인재 양성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대학의 학과 정원 확대에 그치지 말고 설계·공정·소재·장비·패키징·AI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융합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젊은 연구자가 장기간 도전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실패를 용인하면서도 성과에는 정당하게 보상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대기업뿐 아니라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 강한 산업 생태계는 몇몇 거대 기업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과 연구기관, 대학이 함께 성장할 때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형성된다.

여기에 한 가지 원칙을 더해야 한다. 산업 발전의 목적은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 산업의 성공은 기업의 이익과 주가 상승을 넘어 양질의 일자리, 지역경제 활성화, 미래 세대의 기회 확대로 연결돼야 한다. 막대한 전력과 용수를 소비하는 산업인 만큼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지역사회와의 공존 역시 경영의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

기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산업은 사회와 함께 성장해야 하며, 경제 발전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지속돼야 한다.
 
결론- 애플의 거절보다 두려운 것은 한국의 자기만족이다.
애플과 CXMT의 공급 협상 논란은 단순한 기업 간 거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공급 구조가 변하고 있으며, 중국의 산업 생태계가 새로운 경쟁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경고다.

다만 하나의 협상 결렬 보도만으로 반도체 시장의 권력이 완전히 이동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공급 부족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확정할 수 없다. AI 투자의 지속성, 신규 생산시설의 가동 시점, 중국 기업의 생산수율, 글로벌 경기와 최종 수요가 모두 변수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이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현재의 높은 수익성을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로 연결해야 한다. 정부는 단기적인 지원책을 넘어 반도체와 AI, 피지컬 AI를 포괄하는 장기 산업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국회는 정쟁보다 산업 경쟁력과 국가 미래를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에 힘을 모아야 한다.

투자자 역시 호황기의 실적과 주가의 단기 변동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기업의 기술 경쟁력과 현금흐름, 투자 효율, 장기적인 시장 지배력을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존 템플턴 경이 남긴 투자 철학은 비관이 극심할 때 기회를 발견하고 낙관이 지나칠 때 위험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 또한 시장의 소음보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장기적인 경쟁우위를 중시한다.

이 두 거장의 통찰은 오늘날 반도체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호황에 도취되지 말고 불황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시장의 공포에 휘둘리지 않되 경쟁자의 부상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반도체의 역사는 어제의 승자가 내일의 승자라는 보장이 없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쇠퇴를 지켜보며 성장했던 한국이 이제 중국의 추격을 마주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지, 새로운 혁신의 역사를 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애플이 중국 기업에 가격 할인을 거절당했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은 대한민국이 미래의 반도체 시장에서 누구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기술과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가격을 결정하는 기업은 강하다. 그러나 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기업은 더욱 강하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이제 메모리를 잘 만드는 나라를 넘어 AI 시대의 새로운 산업 질서를 창조하는 나라로 도약해야 한다. 그것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과제이자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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