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수교 물꼬튼 인천-웨이하이 페리

  • = 中언론, 개혁개방 30년 주요사건으로 평가

1990년 9월15일 한국과 중국을 연결하는 첫 정기 페리인 진차오(金橋)호가 인천항을 출발해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로 출발했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92년 8월24일 양국은 마침내 정식으로 수교문서에 서명했다.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신경보(新京報)는 19일 중국의 개혁개방 30년을 회고하는 182번째 시리즈 기사에서 인천-웨이하이 정기페리 노선 개설을 다루고 "진차오호의 취항이 중한 수교를 앞당기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인천-웨이하이 정기 페리노선이 개설되기 전까지 중국이나 한국을 방문하려면 일본이나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야만 했지만 이 노선의 개설로 한중간 거리가 하루에서 한나절로 대폭 단축되면서 양국 교류가 급증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인천-웨이하이 노선 개설은 1988년 2월부터 추진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산둥성 출신 화교인 한성호 박사를 청와대로 불러 들여 중국에 있는 친척 가운데 덩샤오핑(鄧小平)과 선이 닿을 만한 고위간부가 있는지를 물었던 것. 마침 이미 1982년부터 톈지윈(田紀雲) 부총리가 이끄는 대한공작판공실을 설치하고 대한 정책 변경을 검토하고 있던 중국도 정기페리노선 개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정기 페리노선 개설에는 한 박사와 면식이 있던 미국계 화교인 비젠궈(畢建國)가 ´거간꾼´으로 나섰다.

그는 1988년 여름 당시 산둥성이 홍콩에서 주최한 외자유치 설명회에서 참석한 한국동원주식회사를 대표해 쑤이구이팅(隨貴庭) 웨이하이시 대외경제무역위원회 주임을 만나 페리노선 개설을 위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쑤 주임은 이 사실을 바로 중앙 정부의 외교부, 대외경제무역부(현 상무부), 교통부 등에 보고했고 곧 교통부로부터 비준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웨이하이시로 돌아갈 듯하던 한중 첫 정기페리노선 개설은 칭다오(靑島)와 옌타이(煙臺) 등 다른 대형 항구도시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외국인이 묵을 만한 3성급 호텔은 커녕 택시도 없었던 작은 도시가 국제페리를 유치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하게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최종 선택은 결국 웨이하이시로 돌아갔다.

페리노선 개설을 위한 실무협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갖은 우여곡절 끝에 1990년 8월12일 양측은 정기페리의 이름을 ´중한 친선의 금색 교량´이라는 의미를 갖는 ´진차오(金橋)´로 붙이기로 하고 한중 합자회사인 웨이하이항운공사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1990년 9월15일 인천에서 첫 출항식이 당시 김영삼 민자당 총재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지만 첫해 운영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매주 2차례 인천과 웨이하이를 오갔던 진차오호는 480명의 승객과 118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선박이었지만 첫 출항 때 승객은 18명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을 크게 변하지 않아 출항 때마다 8만달러씩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회사측은 적자경영을 타개하기 위해 산둥성 여자축구팀에 연간 8만위안을 협찬키로 하고 ´중국 웨이하이-코리아 인천´이 인쇄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가도록 했다.

때마침 한국 정부도 조선족 재중동포의 친척방문을 허용함에 따라 웨이하이를 통해 한국을 오갔던 재중동포들에 힘입어 진차오호는 91년에만 237만위안의 이익을 남겼고 이후 한중 양국을 연결하는 황금알 노선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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