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장희 (대한민국학술원회원, 이대명예교수)
90년대 초부터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일본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거의 20년 동안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여파에 수출이 주춤거리더니 이제는 아예 성장 동력조차 찾지 못한 채 바닥을 헤매고 있는 중이다. 잘못하다간 잃어버린 30년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던 일본경제가 왜 이렇게 장기간 무기력증에 빠져 있을까? 논자에 따라서 그 설명이 다양하나 다음 다섯 가지 구조적 원인은 공통적이다.
첫째는 급변하는 국제경제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했다. 두 번에 걸친 세계적 경제위기 (1997~1998 및 2008~2009)는 모든 나라들에게 금융개혁과 산업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하라는 큰 시그널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보유고가 풍부했던 일본은 금융 산업의 경쟁력 강화나 산업구조조정 등 경제체질 변화를 위한 과감한 개혁에 게을리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화위복이 아니라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된 셈이다. 특히 일본은 국내에 이미 존재하는 과잉설비, 과잉고용에 대한 구조개혁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채로 있다. 각각 20% 정도가 과잉이라는 분석이 꽤 설득력이 있다.
둘째로 일본 특유의 보수적 소비경향이다. 시장에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싶으면 일본 소비자들은 그들의 소비를 거의 무자비 할 정도로 줄인다. 앞에서 말한 두 차례의 세계경제 위기 직후 일본의 국내 소비가 12%나 줄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연금생활자, 실업보험수혜자들 조차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보수적 소비행태가 일본의 이른바 소비포만현상(satiety state)과 맞물려 정부의 수요확대정책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일본정부의 과도한 정부부채와 0%까지 떨어진 정책금리 때문에 재정·금융 정책을 쓸 여유가 없다는 상황도 큰 문제다.
셋째, 일본엔화의 강세현상이다. 최근 세계금융위기 이후 일본엔화 가치만 유독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높은 외환보유고와 해외에 투자된 일본자본의 U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기업들의 부실한 재무상태 때문에 해외에 나가있던 자금을 회수하는 추세라고 한다. 즉 엔화 자체에 대한 국내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세계시장에서 일본기업의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도 특기할 사항이다. 그동안 일본식 기술혁신이 고급·고가품 개발에 집중됐던데 반해 신흥수출국들(중국포함)은 중·저가품 개발에 주력해 제조업 시장점유율 전체를 보면 일본의 몫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고급·고가품의 수요는 최근의 금융위기로 인해 선진국 시장 수요가 크게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중국·인도·러시아·브라질 등의 가전제품 시장에서 일본제품은 크게 밀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거대 중진국 시장에서는 편의성·경제성·견고성 등의 상품 속성이 일본 제조업이 추구하는 고급·고가·세련 등등의 속성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일본의 경제·사회적 병리 현상을 들 수 있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대학 진학을 결심할 때 이공계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졸업 후 진로 선택에 있어서도 제조업 보다는 금융·보험·법률·의료·사회복지·정보·통신·유통 등 서비스 업종이나 예능 업종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추세다. 일본 산업의 중추 신경이라고 볼 수 있는 중소제조업의 후속세대가 아주 엷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제조업계에 미래 지향적 투자가 별로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원인을 잘 분석해 볼 때 상대적으로 한국경제의 입지는 양호한 편이다. 우리나라는 1997~1998년 및 2008~2009년 양대 금융위기에 고통을 당했지만, 그 때문에 구조개혁에 오히려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국내 소비수준은 그런대로 활발한 편이다. 그리고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의 가용수단과 기대치가 나쁘지 않다. 원화가치의 절상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일본의 엔화절상에 비하면 완만한 편이다. 중·저가품의 시장점유율은 중국·인도 등지에서 꽤 높은 편이다. 그리고 중소제조업의 후속세대는 아직 우려할 단계는 아닌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 패턴을 볼 때 우리경제도 일본식 병폐에 빠져 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거시경제 운용에 치밀하고 슬기 있는 선제적 대응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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