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소의 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며 박태준(가운데) 포스코 명예회장이 손을 번쩍 들고 있다. |
1500℃의 뜨거운 쇳물을 쏟아내는 고로(高爐ㆍ철광석에서 선철을 만들어 내는 노)는 사나이들의 강한 집념의 결합체다.
포항제철이 1970년 4월 1일 제철소 건립을 위해 첫 삽을 뜬지 4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세군데의 고로제철소를 가진 제철강국으로 우뚝 섰다. '해야 한다'고 굳게 믿은 이들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선진 공업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산업의 쌀'인 철을 생산할 수 있는 제철소 설립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제자였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포항제철 건설이라는 지상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초 공장 부지를 확보하면 돈과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던 '철광 차관단(KISA)'은 지원불가를 통보한다. 당시 최빈국에 속했던 우리나라가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일본의 문을 두드렸다. 결국 일본 관계자들은 박 회장의 집요함에 손을 들었다. 자금과 기술 이전을 약속했다.
그는 포항의 영일만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국내 첫 일관제철소인 포항제철을 건설해 낸다.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첫 쇳물이 고로에서 쏟아져 나올 때 박 회장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일관제철소 건설을 꿈꾸는 이가 또 있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다. 제철소는 자동차와 조선소에 이르는 중공업 제국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마침내 칼을 꺼내들었다. 정 명예회장은 정부가 제2제철소 설립을 추진한다는 얘기를 듣고 1977년 9월 종합제철소 설립계획안을 냈다. 하지만 정부는 포항제철이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포철의 손을 들어줬고 1984년 광양제철소가 세워졌다.
정 명예회장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길 16년. 1994년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정 회장은 곧 철강 수급이 부족할 것이라며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소를 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의 철강 공급 과잉이라는 주장에 일관제철소 꿈은 다시 꺾이고 만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의 꿈은 아들인 정몽구 현대ㆍ기아차그룹 회장한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일관제철소 꿈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던 정몽구 회장은 관련 회사들을 차분히 인수, 철강부문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2006년 1월 마침내 고로제철소 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10월 기공식을 열었다.
지난 1월 5일 당진제철소 제1고로의 첫 불을 댕길 때까지 정 회장이 여기에 쏟은 애정과 열정은 각별했다. 올해 일흔셋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매주 두세번씩 당진 제철소 건설 현장을 찾아 직원들을 독려하고 현장 구석구석을 둘러본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얘기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정 회장이 고로 화입식 때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번쩍 들어 보이기도 했다"며 정 회장의 당시 모습을 기억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고로제철소의 꿈을 이루려는 사나이가 또 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이다. 지난 5일 서울 본사에서 열린 고 장상태 회장의 10주기 추모식에서 장 회장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고로 제철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0년 4월 타계한 아버지 생각에 장 회장은 이날 추모식에서 브라질 고로제철소 추진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이들의 신념에서 시작된 고로제철소. 이제는 한국 산업 발전의 노둣돌이 돼 또 다른 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아주경제 김병용ㆍ이정화 기자 jhlee@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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