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인간적 슬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0-04-22 12:4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맹인 검객이라는 이색적인 캐릭터로 변신한 황정민은 표정 하나부터 걸음걸이까지 마치 실제 맹인이 된 듯 디테일한 연기를 선보이며 단단한 연기 내공을 자랑한다(사진 위). 조선 최고의 검객이자 반란군 수장 이몽학을 연기한 차승원은 대의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면 연기와 냉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스크린을 장악한다(사진 아래).

(아주경제 인동민 기자)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가던 조선 중기. 이몽학(차승원)은 황정학(황정민)과 함께 ‘대동계’를 만들어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 자신들을 정치에 이용하려 드는 조정 대신과 무능한 정권에 환멸을 느낀다. 이에 조정은 이들을 역모로 몰아 대동계를 해체 시킨다.

이후 이몽학은 혼탁한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반란의 칼을 휘두르며 역적이 되기를 자처한다. 연인인 백지(한지혜)와 오랜 동료를 자기 손으로 버려야 했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꿈을 위해 궁으로 향한다.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황정학은 옛 동료인 그의 그릇된 꿈을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망나니 같던 서자 견자(백성현)를 제자로 삼아 무술을 가르치며 함께 그를 쫓는다….

궁으로 들어간 광대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의식을 건드린 ‘왕의 남자'로 1000만 신화를 달성한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이 감독의 사극은 권력자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정치 논리에 휘둘려 희생당할 수 밖에 없었던 약자를 전면에 내세워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역사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이준익표 사극. 그가 왕의 남자 이후 5년여 만에 선보이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저작상(1996)’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의 책 100(2004)’ 등에 선정 되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박흥용 화백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미술과 문학의 완벽한 만남으로 기존의 만화를 넘어선 걸작을 ‘그래픽 노블’이라 한다면, 선 굵은 스토리와 사회적 메시지가 조화를 이룬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한국형 그래픽 노블’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

오래 전부터 원작 만화의 많은 팬들은 영화화를 꿈꿔왔고, 단연 그 적임자로 이 감독을 손꼽았다. 이 감독은 팬들의 기대 속에 5년간의 기획 기간을 거치면서 원작을 해체하고 재조합했다.

신분 차별에 대한 울분을 갖고 있던 견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한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시켜 황정학과 이몽학, 견자, 백지 네 사람의 다층적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관념적인 이야기가 실존적인 사건으로 구체화되고, 인물들의 관계망도 더욱 촘촘히 메워져 강렬한 서사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왜구의 침입과 지독한 파벌 싸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던 16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평등 세상을 꿈꾸는 검객, 왕족 출신의 반란군, 세도가의 서자, 기생의 신분을 가진 네 인물이 역사의 한 가운데를 관통해 간다.

나라의 운명에 등 돌린 채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만 일삼는 무능한 정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좌절된 꿈을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인물들의 모습 속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과 갈증이 투영돼 있다. 어둡고 억압적인 세상에 치열하게 부딪히며 자신을 둘러싼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은 시대의 모순과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ㆍ사랑ㆍ꿈ㆍ신념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의 네 주인공은 각자 다른 사연과 꿈을 품고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맹인검객 황정학은 같은 꿈을 나누었던 이몽학의 그릇된 야망을 막기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칼을 든다. 반란군 이몽학은 자신의 꿈을 위해 피도 눈물도 없이 칼을 휘두른다. 세상 앞에 무기력했던 서자 견자는 황정학을 만나 검술을 익히면서 비로소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칼이 칼집에서 꺼내지는 순간과 칼과 칼이 서로 부딪히는 찰나, 그것은 단순한 액션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연과 감정이 말보다 더 강렬하게 부딪히는 ‘칼의 대화’가 된다.

이 감독은 판타지적인 와이어 액션을 배제하고, 두 발을 땅에 디딘 채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사실감 있는 액션을 통해 이러한 의도를 더욱 살렸다. 드라마의 기승전결에 적절하게 배치돼 인물들의 갈등을 파워풀하게 담아내는 칼 싸움 장면들은 액션 자체의 시각적 쾌감뿐 아니라 영화 전체의 내러티브와 맞물리며 더욱 강렬하고 깊이 있는 드라마로 완성됐다.

더불어 이 작품은 한국의 수묵화를 컨셉으로 먹의 터치와 여백을 살린 절제의 미학을 선보였다. 이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1592년 조선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면서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인물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작품의 주요 공간인 견자의 집은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인 만큼 흑백을 기본 컬러로 삼아 정숙하고 기품 있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백지의 공간인 기생집 역시 섬세한 문양이 들어간 천과 한지, 은은한 홍등으로 우아하게 마무리했다. 클라이막스 장면의 배경이 되는 근정전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궐이 아니라 전쟁과 반란의 잿더미에 뒤덮인 황폐하고 적막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시대적 배경을 충실히 살리며 인물들의 감정적 파고를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완성된 ‘비움의 미학’은 강렬한 색채를 자랑하는 여타 사극의 미술과는 시각적인 차별화를 만들어내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만의 미학을 보여준다.

또한 원작과 달리 시대상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명분 대 명분의 대립으로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슬픔을 인간적 공감의 열기 안에 담아냈다. 구름에서 벗어난 달처럼 침체된 한국영화계를 환하게 비춰 줄 수 있을지 기대된다. 29일 개봉한다.



idm81@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