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5남 2녀의 장남이 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7세에 처음으로 가출했다. 이후 네 번의 가출 끝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지런함과 신용으로 쌀가게 주인이 됐다. 이후 일제 강점기, 해방, 6·25 전쟁, 군사 독재, 민주화 운동이라는 격변의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경영자가 됐다.
그가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다.
이제부터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시대를 초월한 그의 경영철학에 대해 새로이 해석해 본다. 또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점검해 보자. <편집자 주>
![]() |
||
소년 정주영(맨 왼쪽) 모습. 정주영은 1931년 17세의 나이로 첫번째 가출을 시도했다. (출처=정주영박물관) |
1931년, 17세의 청년 정주영은 처음으로 가출했다. 정주영의 최종 학력인 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진짜 농사꾼이 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봉식씨의 손에 이끌려 새벽 다섯시부터 농사일을 했던 정주영은 하루 온종일 일만 해도 세 끼 밥을 먹을 수 없던 현실이 지긋지긋했다.
![]() |
||
1930년대 당시 농가 모습. |
첫 번째 가출의 목적지는 함경남도 청진이었다. 당시 이 곳은 조선 전역에서 가장 공업이 흥했던 지역이다. 돈 한 푼 없었던 정주영은 통천에서 120㎞ 길을 무작정 걸었다. 하루쯤 걸었을까, 원산에 못 미쳐 고원이란 곳에 도착했다. 마침 이 탄광촌에는 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는 이 곳 ‘함바’(노동자용 간이 숙소)에 머무르며 막노동을 하게 된다.
하루 45전을 벌어 먹고자는 데 32전을 쓰고, 그나마 남은 돈도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을 빼면 본전치기였다. 이런 날이 두 달쯤 지났을까.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왔고, 정주영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 정주영은 과수원에서 썩은 사과를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잊지 않기로 결심한다.
정주영의 가출은 계속됐다. 두 번째 목적지는 금강산. 나무를 판 돈 30전을 들고 소학교 동창 조언구, 정창령이 동행했다. 하지만 일도 구하지 못하고 사기꾼에게 가진 돈을 다 빼앗겨 버린 뒤 결국 장남을 찾아나선 아버지의 손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 번째 가출은 더욱 대담해졌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가출해 부기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이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장남이 농사를 버리고 가족이 거지꼴이 되는 걸 두고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집념은 시골에서 배를 곪을 수 없다는 청년 정주영과 막상막하였다. 정주영은 서울로 찾아와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에 항복,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기서 질 청년 정주영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300석지기 부농의 아들이었던 소학교 동창 오인보를 찾아 또다시 가출했다. 네번째였다. 참고로 오인보는 훗날 현대그룹의 시초인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 멤버가 된다.
![]() |
||
1930년대 고려대 본관 신축 건물 현장. |
청년 정주영 최초의 ‘출세’였다. 밥 세끼 해결에 쌀 반가마니를 월급으로 준다는 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보면 자리를 잡은 정주영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자 “네가 출세를 하기는 했나 보다, 한 달에 쌀 반가마니를 받다니”라며 가출한 아들에게 두 손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4년 동안 일했다.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이 곳에는 여섯 명의 쌀 배달꾼이 있었는데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창고 정리를 하는 농사꾼다운 부지런함에 부기 지식을 갖춰 장부 정리를 할 수 있었던 정주영은 단연 두드러졌다.
복흥상회 주인의 딸인 이문순 여사는 훗날 어머니가 청년 정주영의 성실성과 독서열에 감탄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자전거에 서툴렀던 청년 정주영이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자전거를 망가뜨렸지만 주인이 평소 성실함에 눈감아 준 일화는 유명하다.
![]() |
||
청년 정주영(왼쪽)과 복흥상회 안주인 이문순 여사 모습. (출처=정주영박물관) |
1930년대 당시 충무로 일대에는 십여 곳의 쌀가게가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등 세 개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의 옷가게, 양품점, 화장품 가게, 카페, 다방, 빵집 등이 즐비했다. 경성부청(서울시청) 직원 관사와 제일은행 사택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이 곳에서 일한 지 3년만인 1938년, 복흥상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를 차렸다. 24살에 자신의 첫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가게를 난봉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던 주인은 일찍이 정주영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돼 신이 난 정주영은 물불 안 가리고 거래선을 확장시켜 나간다. 당시 최고 부자 중 하나였던 화신백화점의 창업주 박흥식씨도 그 때 단골로 만들었다.
참고로 정주영은 2000년 3월, 박흥식 씨의 당시 집이었던 종로구 가회동 2층 양옵직을 사 말년을 이 곳에서 보낸다. 당시 눈여겨 봤다고 하기 보다는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2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청년 정주영의 첫 CEO 경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고, 조선의 모든 쌀가게가 문을 닫게 됐고 정주영의 ‘경일상회’도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후일 경영자로써 가장 무서운 것은 ‘정변’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정주영의 남은 돈은 당시 은행원 15개월 치 봉급인 1050원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에게는 돈 이상의 재산을 갖게 된다. 바로 ‘신용’이었다.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논 2000여 평을 사 드리고, 정주영과 평생을 해로하게 될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휴식은 길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 정주영은 1940년 현대그룹의 전신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현대그룹의 역사를 쓰게 된다. (2편에 계속)
![]() |
||
청년 사업가 정주영(가운데)과 동생들. (출처=정주영박물관) |
아주경제 특별취재팀(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