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1-1] 농부의 아들, 첫 CEO 되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0-05-12 01:5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네 번의 가출, 그리고 쌀가게 점원서 창업까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210번지. 눈이 집을 덮을 듯한 금강산 자락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 한 중농 집안에 첫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5남 2녀의 장남이 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7세에 처음으로 가출했다. 이후 네 번의 가출 끝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지런함과 신용으로 쌀가게 주인이 됐다. 이후 일제 강점기, 해방, 6·25 전쟁, 군사 독재, 민주화 운동이라는 격변의 한국사에 한 획을 그은 경영자가 됐다.

그가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다.

이제부터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시대를 초월한 그의 경영철학에 대해 새로이 해석해 본다. 또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시 점검해 보자. <편집자 주>

   
 
 소년 정주영(맨 왼쪽) 모습. 정주영은 1931년 17세의 나이로 첫번째 가출을 시도했다. (출처=정주영박물관)

1931년, 17세의 청년 정주영은 처음으로 가출했다. 정주영의 최종 학력인 송전소학교를 졸업하고 진짜 농사꾼이 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봉식씨의 손에 이끌려 새벽 다섯시부터 농사일을 했던 정주영은 하루 온종일 일만 해도 세 끼 밥을 먹을 수 없던 현실이 지긋지긋했다.

   
 
 1930년대 당시 농가 모습.
당시 조선시대는 제 2차 세계대전을 몇 년 앞두고 일본의 수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였다. 불이흥업 같은 일본 기업이 들어와 논밭을 무제한으로 사들였고 이천만 조선 농민은 소작농화 돼 가고 있었다. 소작농은 아니었지만 촌구석 중농인 정씨 집안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첫 번째 가출의 목적지는 함경남도 청진이었다. 당시 이 곳은 조선 전역에서 가장 공업이 흥했던 지역이다. 돈 한 푼 없었던 정주영은 통천에서 120㎞ 길을 무작정 걸었다. 하루쯤 걸었을까, 원산에 못 미쳐 고원이란 곳에 도착했다. 마침 이 탄광촌에는 철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는 이 곳 ‘함바’(노동자용 간이 숙소)에 머무르며 막노동을 하게 된다.

하루 45전을 벌어 먹고자는 데 32전을 쓰고, 그나마 남은 돈도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을 빼면 본전치기였다. 이런 날이 두 달쯤 지났을까.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찾아왔고, 정주영은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 정주영은 과수원에서 썩은 사과를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평생 잊지 않기로 결심한다.

정주영의 가출은 계속됐다. 두 번째 목적지는 금강산. 나무를 판 돈 30전을 들고 소학교 동창 조언구, 정창령이 동행했다. 하지만 일도 구하지 못하고 사기꾼에게 가진 돈을 다 빼앗겨 버린 뒤 결국 장남을 찾아나선 아버지의 손에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 번째 가출은 더욱 대담해졌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가출해 부기학원에 등록했다. 하지만 이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장남이 농사를 버리고 가족이 거지꼴이 되는 걸 두고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집념은 시골에서 배를 곪을 수 없다는 청년 정주영과 막상막하였다. 정주영은 서울로 찾아와 눈물을 보이는 아버지에 항복,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기서 질 청년 정주영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300석지기 부농의 아들이었던 소학교 동창 오인보를 찾아 또다시 가출했다. 네번째였다. 참고로 오인보는 훗날 현대그룹의 시초인 현대자동차공업사의 창립 멤버가 된다.

   
 
 1930년대 고려대 본관 신축 건물 현장.
인천 부둣가, 서울 공사 현장(청년 정주영은 현재의 고려대 본관 신축 건물 현장<사진>에서 일한 적도 있다), 풍전 엿 공장(동양제과의 전신)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첫 성공의 밑거름이 된 ‘복흥상회’에 쌀 배달꾼으로 취직하게 된다.

청년 정주영 최초의 ‘출세’였다. 밥 세끼 해결에 쌀 반가마니를 월급으로 준다는 건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보면 자리를 잡은 정주영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자 “네가 출세를 하기는 했나 보다, 한 달에 쌀 반가마니를 받다니”라며 가출한 아들에게 두 손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4년 동안 일했다.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이 곳에는 여섯 명의 쌀 배달꾼이 있었는데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창고 정리를 하는 농사꾼다운 부지런함에 부기 지식을 갖춰 장부 정리를 할 수 있었던 정주영은 단연 두드러졌다.

복흥상회 주인의 딸인 이문순 여사는 훗날 어머니가 청년 정주영의 성실성과 독서열에 감탄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자전거에 서툴렀던 청년 정주영이 비 오는 날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자전거를 망가뜨렸지만 주인이 평소 성실함에 눈감아 준 일화는 유명하다.

   
 
 청년 정주영(왼쪽)과 복흥상회 안주인 이문순 여사 모습. (출처=정주영박물관)

1930년대 당시 충무로 일대에는 십여 곳의 쌀가게가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등 세 개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의 옷가게, 양품점, 화장품 가게, 카페, 다방, 빵집 등이 즐비했다. 경성부청(서울시청) 직원 관사와 제일은행 사택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는 이 곳에서 일한 지 3년만인 1938년, 복흥상회를 물려받아 ‘경일상회’를 차렸다. 24살에 자신의 첫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가게를 난봉꾼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던 주인은 일찍이 정주영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돼 신이 난 정주영은 물불 안 가리고 거래선을 확장시켜 나간다. 당시 최고 부자 중 하나였던 화신백화점의 창업주 박흥식씨도 그 때 단골로 만들었다.

참고로 정주영은 2000년 3월, 박흥식 씨의 당시 집이었던 종로구 가회동 2층 양옵직을 사 말년을 이 곳에서 보낸다. 당시 눈여겨 봤다고 하기 보다는 현대그룹 계동 사옥에서 2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청년 정주영의 첫 CEO 경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령을 내렸고, 조선의 모든 쌀가게가 문을 닫게 됐고 정주영의 ‘경일상회’도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정주영은 후일 경영자로써 가장 무서운 것은 ‘정변’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정주영의  남은 돈은 당시 은행원 15개월 치 봉급인 1050원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에게는 돈 이상의 재산을 갖게 된다. 바로 ‘신용’이었다.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논 2000여 평을 사 드리고, 정주영과 평생을 해로하게 될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휴식은 길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 정주영은 1940년 현대그룹의 전신인 아도서비스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현대그룹의 역사를 쓰게 된다. (2편에 계속)

   
 
 청년 사업가 정주영(가운데)과 동생들. (출처=정주영박물관)

아주경제 특별취재팀(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