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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는 이번 영화에서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미자’ 역을 맡았다. 호기심도 많고 엉뚱한 캐릭터의 미자는 우연히 시를 쓰게 되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裏面)을 보게 된다. |
(아주경제 인동민 기자) 일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서민들의 아픔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이창동 감독.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고통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아니 더 아프고 힘들게 전해진다.
하지만 그 아픔들을 다시 곱씹어보면 놀랍게도 일상적이다. 누구나 자신이 겪는 일이 가장 힘든 시련이라 생각한다. 그 지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의 영화는 고통스럽지만 잔인하리만큼 현실적이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의 이 감독이 다섯 번째 작품인 ‘시’로 돌아왔다. 왜 ‘시’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는 “경제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우리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지…”라고 답한다. 궁극적으로 본인에게 ‘시는 무엇인가’는 곧 ‘영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의 속 깊은 곳에서 숙성시켜온 오랜 질문.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대신해서 표현해 주고 싶다는 이 감독. 그러기에 ‘시’는 그 어떤 작품보다 그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또한 1966년 당시 경이로운 1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신인배우 오디션에 합격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배우 윤정희.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그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의 주역이 된다. 단역 혹은 조역부터 영화를 시작했던 문희, 남정임과는 달리 그녀는 첫 작품부터 주연을 맡으며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또 그녀는 24회에 달하는 경이로운 여우주연상 수상 기록을 가진 유일한 여배우다. 그런 배우 윤정희가 돌아왔다. 수많은 러브콜을 거절해왔던 그녀가 이창동 감독의 ‘시’로 16년 만에 컴백소식이 알려지자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 했다. 화려한 데뷔, 절정의 인기, 세기의 결혼까지…. 그녀의 움직임은 늘 화제가 된다.
윤정희는 이번 영화에서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한 ‘미자’ 역을 맡았다. 호기심 많고 엉뚱한 캐릭터의 미자는 우연히 시를 쓰게 되며,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이면(裏面)을 보게 된다.
이 감독과 윤정희가 처음에 생각한 미자는 서로 조금 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려 한 미자는 촬영이 시작된 순간 하나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윤정희는 자신의 역할이 본명과 같은 ‘미자’라는 사실에 놀랐고, 이 감독은 ‘시’를 위해 미자가 아닌 다른 이름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미자는 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캐릭터이다. 60대의 나이지만 소녀 같은 순수함을 가졌지만 그 내면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가 숨어 있다.
‘시’는 참 짧은 한마디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시(時), 어느 한 때를 말하는 것일까? 시(市), 어느 특정한 한 도시를 말하는 것일까? 유명 소설가 출신인 이 감독이 문학의 또 다른 하나인 시(詩)를 그의 다섯 번째 작품의 제목으로 정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한 달 동안 한편의 ‘시’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받는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 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시’는 도전이다.
이 감독의 전작인 초록물고기의 막둥이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밀양의 신애 이들은 모두 영화 속 사건의 중심이 된다. 모두 어긋난 세상, 무심한 시선의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시’의 주인공은 다르다. 미자는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어찌 보면 제 3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행태들을 바라본다.
이 작품에서 오히려 가해자 혹은 피해자 그들은 죄의식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바라보는 입장의 미자의 가슴에는 참을 수 없는 응어리가 맺힌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 번도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미자는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외침을 감행한다.
이 감독은 진실을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의 냉철한 통찰력은 무감각하거나 잊고 있었던 현실을 현실보다 잔인하게 묘사해 관객으로 하여금 깊은 고통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는 영화음악 선곡에 신중하기로 유명하다. 같은 편집 본일 지라도 영화음악은 때로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단 한 곡의 음악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강물소리를 메인 테마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운드만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시’에서의 일상적인 소리들은 그 어떤 거장이 작곡한 영화음악보다 힘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한편 그의 다섯 번째 작품 ‘시’가 제 63회 칸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영화계는 ‘시’가 칸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진출할 것이라고 점치기 시작했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칸 영화제 사무국은 ‘시’의 프랑스 자막 본을 받은 즉시 시사를 했다. 그 다음날 곧바로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이 감독에게 직접 “세련된 단순성, 휴머니티, 그만의 형식, 그리고 시 그 자체가 있는 뛰어난 작품으로 보편적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영화다”라는 감상과 함께 극찬을 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지난달 15일(현지시간) 칸 영화제 사무국은 ‘시’가 제 63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진출했음을 발표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002ㆍ감독상)’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4ㆍ심사위원대상)’ 이창동 독의 ‘밀양(2007ㆍ여우주연상)’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ㆍ심사위원상)’에 이어 또 한 번의 낭보가 기대된다. 13일 개봉.
idm81@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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