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경영학 3] 진시황이 공자를 두 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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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11-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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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양철학을 떠받치는 두개의 큰 기둥은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의 사상이다. B.C 500년대를 함께 풍미했던 두 성인은 학문의 선후배로서 서로 경외하는 사이. 사상적 갈등요소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초간노자(楚簡 老子)가 이를 증명한다. 후대의 정치가와 일부 학자들이 노자가 공자의 사상을 공격했던 것으로 노자의 원본을 왜곡했다. 그 바람에 두 성인의 후학(後學)들은 2000년 넘게 사활을 거는 논쟁을 펼쳐왔다.

그 것도 단 ‘세 마디의 말’이 왜곡되는 통에 양대 사상이 충돌해 왔다. 바로 공자가 중시하는 “성(聖)ㆍ인(仁)ㆍ의(義)를 버리라”고 노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자가 도덕경에서 ‘성지(聖智)ㆍ인의(仁義)ㆍ교리(巧利)’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는 논리.

왜곡된 도덕경속의 단 세 마디의 말 때문에 공자학파는 노자를 공격해 왔다. 유학자들은 노자를 금서(禁書)로 생각해 왔다. 최근까지 노자학파도 공자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해괴한 해설을 내놓기도 했다.

"‘인의’라는 덕목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생각해보라. 부처가 교설한 자비는 또 얼마나 많은 피를 이 땅에 뿌렸는가 말이다. 이차돈의 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덕목으로 삼은 데서 온 오기의 결과다. 사랑으로 대속하고 죽어간 예수의 십자가를 앞세우고 얼마나 많은 전쟁과 살육이 있었나.

그래서 노자는 성인(聖人)을 말하고 큰 지혜를 말하면서 그것을 끊고, 그것을 버려야 백성이 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자의 인의는 알다시피 숱한 사람을 때려잡았다. 조선조 유교사회가 인의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핍박하고 그 가치를 옭아매서 인간사회에 비극을 양산했는지 생각해보라."

노자가 하지도 않은 세 마디의 말을 왕필(王弼)이 해설한 도덕경에서 기정사실화 했다. 후대에 유학자들은 발끈하고, 노자학파는 이를 맞받아치는 억지 해설을 늘어 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코미디라 아니 할 수 없다.

실인즉 노자는 변(辯)ㆍ위(爲)ㆍ려(慮)를 버리라고 했다. 즉 괘변과 거짓, 모사를 버리라는 것이다. 후대 학자들이 성ㆍ인ㆍ의을 버리라는 것으로 억지 해설 했으니 유가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개작이 이루어지고, 가능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B.C 501년 공자 나이 51세때 노자를 찾아가 예(禮)를 문의한 일이 있었다고 장자(莊子)는 말하고 있다. 이때는 남북으로 초(楚와) 진(晉)이 대치하고, 동서로 제(齊)와 진(秦이) 견제하던 시절이었다. 두 성인은 학문적 충돌이 없는 동지(同志)였던 것으로 사료의 곳곳에 나온다.

그리곤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B.C 200년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진시황이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진시황의 최대 관심은 ‘황권을 어떻게 영속적으로 이어갈까’ 하는 것. 고민거리를 풀어 준 사람이 바로 한비(韓非)였다.

한비가 저술한 책이 한비자(韓非子). 진시황이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동해 한비를 얻기 위해 그가 있는 한(韓)나라를 공격했다고 사기(史記)는 말한다. 한비는 유가인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지만 유가와는 정반대의 사상을 지닌 인물.

그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선왕의 도, 즉 성을 버리고 국가경영에서 인정을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도 인이나 의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법은 절대적이므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즉, 아버지가 법을 어기면 아들은 숨기지 말고 고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유가학파가 글로써 법을 어지럽히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진시황이 감동받은 대목은 이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비는 결국 친구 이사(李斯)의 모략으로 죽었다. 이사도 진시황 밑에서 승상으로 활약하면서 유가를 배척했다. 진시황의 뜻에 따라 비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진나라의 역사책과 의약이나 농사 서적을 제외하곤 모든 책들을 불살랐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유생 460여명을 산 채로 매장해 버린 게 B.C 212년. 이렇게 볼 때 노자의 왜곡을 주도한 것은 진시황이고, 공모자는 한비와 또는 이사로 추정된다. 노자가 변ㆍ위ㆍ려를 버리라고 한 것을 성ㆍ인ㆍ의를 버리라고 왜곡한 것이 그 실체다.

불만이 많고 백성을 선동하는 유가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한비와 이사가 명망높은 노자를 이용한 셈이다. 노자도 성ㆍ인ㆍ의를 버리라고 했는데, 이를 버리지 않아 혼란스러우니 재야세력 유가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는 고도의 책략.

역사의 왜곡은 이렇듯 후대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20세기 모택동(毛澤東)시대의 문화혁명도 같은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안. 말 잘하는 자의 입을 막아버리고 옛 것에 심취해 현재를 비판하는 자를 숙청하려고 문화혁명이 단행되지 않았을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릇된 역사왜곡과 잘못된 말 한마디 탓에 정쟁과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특히 정치인이나 학자는 물론 언론인들이 노자의 왜곡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 듯 싶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노자학파와 공자학파는 마음속의 앙금을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21세기에 동양사상이 더욱더 활짝 꽃 피우지 않을까.

초간노자의 제31장 안유인의(安有仁義)는 “어찌 인의(仁義)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상하지유지(大上下知有之), 기차친예지(其次親譽之), 기차외지(其次畏之),기차모지(其次侮之). 신부족(信不足), 안유불신(安有不信)? 유호기귀언야(猶乎其貴言也). 성사수공(成事遂功), 이백성왈아자연야(而百姓曰我自然也). 고대도폐,안유인의(故大道廢,安有仁義)? 육친불화,안유효자(六親不和,安有孝慈)? 방가혼란,안유정신(邦家昏[亂],安有正臣)?

가장 휼륭한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백성들은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며, 그 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가까이하고 찬양하며 그 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그 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업신여깁니다. 군주가 성신(誠信)이 부족하기 때문에, 백성들도 자연히 그를 불신하는 것 아닐까요? (훌륭한 군주는) 말(言;令)을 소중히 여기고 함부로 말하지 아니합니다. 일을 완성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면, 백성들은 ‘우리들에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가 아주 문란해지면, 어떻게 인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육친(六親)이 화목하지 못하면, 어떻게 효도와 자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어떻게 정직한 신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군주가 덕을 베풀지 않아 도를 어기면 인.의가 사라질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효도와 자애라는 덕목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갈등이 확산돼 나라와 가정 모두가 혼란진다는 말이다. /곽영길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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