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대자리 인근에 조그만 주말농장을 시작한지 몇 개월 됐다. 집에서 차로 1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밭인데, 1년 임차료가 10만원이다.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 함께다. 도시 농부를 표방하며 농사의 맛만 보겠다는 사람들인데 무려 5년 이상 꾸준히 작물을 키우는 전문가 수준의 이들도 꽤 있다. 풍경소리, 우보 등 서로 별명을 부르는데 정감이 뚝뚝 묻어나기도 하고 한편 어색하기도 하다.
서울 변두리에서 나고 자라 도회물만 잔뜩 먹은 헛똑똑이가 이 사람들과 친해져 유기 농산물만 얻어 먹으려던 속셈이었는데 막걸리 한 두 잔 걸치다가 술김에 그만 돈을 내버렸다. 안할 수가 없게 됐고 호미, 괭이, 쇠스랑 등 농기구마저 공동구매를 하게 됐다. 어슬렁저슬렁 입맛을 다시며 "뭐 그까이꺼, 안 되면 말구…." 이런 심뽀였다.
이런 저런 곡절 끝에 급기야 생애 최초로 내 손으로 밭을 매고 거름을 준 뒤 이랑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기에 이르렀다. 심어 놓고도 뭐가 뭔지 구분이 안 가지만 대략 감자, 아욱, 청상추, 입들깨, 열무 등을 심은 것 같다. 몇 주 지나자 워낙 흙이 좋아 그런지 제법 작물이 자라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젠 어떤 게 잡초인지 구분이 안 갔다.
이렇게 어설픈 농부 흉내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지만 함께 밭을 일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트렌드의 징후가 확실히 느껴졌다.
일단 이들 도시 농부들의 면면이 '중산층 엘리트'라는 점이다. 이들의 직업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대개 교수, 회사원, 출판 기획자, 상급 노조간부, 외무 공무원, 공사 직원, 자영업자, 사업가 등이다. 허드레 옷을 걸치고 장화를 신고 있으니 외양은 천상 어설픈 초보 농부지만 자기소개를 할 때는 이들이 분명 도시생활에 잘 적응된 '중산층 이상 엘리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농사일이 그냥 취미생활로만 멈출 것 같지 않고 뭔가 '터닝포인트'를 만나 큰 사업이 될 것 같은 조짐도 엿보였다. 주말농장이라고 해서 취미로 자투리 땅이나 겨우 일구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모임은 강화도와 대자리 일대에 수천여평의 농장을 약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회원 중 지방대학 교수 한 분은 "유기 농산물이 일부 부유층의 먹거리로만 국한되는 건 모순이다. 기업적 유기농 사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눈을 빛냈다. "언젠가 내 농사를 짓고 사업화도 시킬까 해서 연습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산촌유학, 폐교를 활용한 예술 공간, 특용작물 재배에 올인한 귀촌·귀농 엘리트들이 TV에 소개되고 인구 유입을 위한 지자체의 귀촌·귀농 프로그램에 지원자가 쇄도하는 현상이 남 얘기만은 아니었구나,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21세기 도시 생활은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정된 자원의 값은 비싸지고 사람 할 일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신하며 도시민들은 과잉 공급된 부동산과 인프라의 관리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이권다툼의 경연장으로 전락한 도시 학교의 장래는 암울하다. '금융'과 '소비', '교육'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도시는 이들에게 더 이상 안전한 터전이 아니다. 이를 눈치 챈 중산층 엘리트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대이동하는 트렌드 징후가 주말 농장에서 쑥쑥 자라고 있는 것이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아주경제 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