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여성 전문가가 난생 처음 만난 사람에게 두서 없이 이런 속내를 털어 놨다.
'성공을 위해 출산을 포기했다'는 설정이 시시한 드라마 속에서 흥미 돋우기 수단으로나 등장하는 레퍼토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현실이었다니.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 숨이 멎었고 귀가 먹먹해졌다. 길게 이어진 그녀의 다음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길을 잃은 아기 코끼리처럼 당황해하는 그녀의 마음도 담배연기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출산마저 포기하는 가혹한 결정을 내리다니.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하다니…….'머리가 어지러웠다.
더구나 그녀는 단지 일에 몰두하기 위해 야근과 출장이 잦은 직장생활의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미어졌다.
벌써 몇 해 전의 기억이건만 씁쓸해 하는 그녀의 표정, 그 공허한 눈동자가 아직도 뇌리에 각인돼 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당시만 해도 신문, 방송에 자주 등장하던 그녀의 이름과 얼굴이 몇 년째 보이지 않는다. 대체 직장생활이 뭐 길래……. 다시 되새겨도 마음이 아프다.
직장생활이 남성들에게도 고역이라는 건 뉴스가 아니다. 출산 포기의 심적 고통을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못지않은 스트레스 지옥에서 시름시름 앓으며 하루하루 연명한다. 남성들의 직장 스트레스는 흔히 실적과 서열 경쟁에서 온다. 처음엔 실적에 쫓겨 허둥대다 된통 당하고, 조금 요령이 생기면 좋은 실적이 꼬투리가 돼 짓밟히기 일쑤다. '나보다 잘 나가는 꼴은 못 본다'는 동료와 '나를 넘어 서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주마'는 선임자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직장 생활의 성공담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인용하는 속담 1순위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이다.
조언이나 충고 정도로 두루뭉수리 넘어 가도 될 일을 어느 밀실에선가 꼬아 바쳐 함정에 빠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친한 동료나 선후배다. 게다가 대개 '함정이다' 깨달은 순간은 이미 너무 늦어 있다. 어느 샌가 최고위층의 눈 밖에 나 악성 루머의 벌판에서 헤매는 신세가 돼 있다. 그러나 일에 몰두 하느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해명도 구차하다'고 우울한 기분에 빠지는 어느 날이 곧 고달픈 직장생활의 제삿날이 된다.
어이없는 가정이지만 만일 이런 남성의 부인이 출산마저 포기하고 직장생활에 몰두하는 여성이라면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왜 우리의 직장생활은 이렇게 씁쓸한 이야깃거리가 되어야 할까? 직장문화가 여성을 우대하고 상하 소통이 자유로운 풍토로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리는 이야기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직장생활이 정녕 모두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직장이 천국은 아니어도 '계속할지 말지' 갈등의 지옥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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