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인문학은 인간 본연의 감성과 정서, 이성을 다루는 학문으로 삼라만상을 객관적 대상물로 취급하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공학과는 다르다는 취지다.
역사학도 지성사나 예술사, 생활사, 왕조사 등 인간 냄새가 나는 분야는 인문학의 범주로 인정되나 현미경과 진단시약 같은 도구가 동원되는 고고학이나 자연사, 집단 역학을 다루는 정치사회사 등은 배제된다.
최근 몇 년간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이런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문학(人文學)'이 글자 그대로 인간의 모든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서로 경계를 넘어 섞여 부대찌개처럼 '퓨전'되어야 인간 삶의 진면목을 이야기로 담아 내고 또 첨단 문명의 인문학적 쓰임새를 규명하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제기다.
정통 인문학자들이 듣기에 불쾌하거나 생경한 이런 의문은 아마추어들이 주로 던지는 것이긴 하나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시사하는 점이 많다는 생각이다.
최근 문사철 학자들은 물론 예술, 공연 등 온갖 콘텐츠 생산자들은 단순하고 주관적인 과거회상형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일시적인 유흥 오락의 영역에 머물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는 것 같다.
화가들이 캔버스 틀에서 해방된 설치 미술에 도전하는 추세(리움, '미래의 기억들 전')나 소설과 시가 그림과 만나는 각종 전시회(교보문고, '이상(李想) 그 이상(以上)을 그리다' 전) 등이 그 조짐으로 보인다.
'미래의 기억들 전'을 감상했다는 한 여성 미술 애호가는 "그림없는 전시 자체가 파격적으로 다가왔고 작품마다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며 "시대를 앞서간 전시회였다"고 평했다.
윤후명(소설가ㆍ화가), 민정기, 최석운, 이인, 한생곤(화가) 등 이상(李想ㆍ시인)의 시(詩)에 조응하는 작품들을 전시한 화가들은 "문학과 미술이 경계를 넘는 동거동락의 기회가 많아지고 더 나아가 대중들과 신선하게 만나는 각종 시도가 더 많이 더 파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에는 고단위 수학 지식을 고대 전승과 버무려 추리기법으로 녹여낸 수학소설(시간여행, '이 것이다')도 등장했다. 이문열 선생이 "국내 최초의 본격 수학소설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쓴 화제작이다.
대학에서 신소재 공학을 전공했고 전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 출신의 작가 김태연씨는 "수학이 없는 인문학은 증명되지 않은 엉터리 공리와 같지 않을까요?"라며 화두를 던졌다.
'마케팅적으로 조작된 이야기 구조로 눈물이나 쥐어짜는 소설'같은 걸 의미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소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퓨전 인문학'은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감성이나 정서적 각오, 사상적 의지를 누르고 다지는 정도의 좁은 문사철 시각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고작 역사 풍자나 생태학적 삿대질을 신선하다며 자화자찬한다. 방황하는 실존의 정신병리적 푸념과 사회정치적 신세 한탄도 아직 너무 많이 눈에 띈다.
보다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퓨전 인문학 생산자들이 어서 빨리 떼로 나타나 '퓨전 인문학'의 시대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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