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上海) 엑스포가 31일로 막을 내린다. 184일간의 대장정동안 7000만명을 넘어서는 관람객, 192개 국가와 50개 국제기구를 합한 242개 참가단, 420억달러에 달하는 투자금액, 서울 여의도 면적의 62%를 상회하는 5.28km2의 대회장 면적, 하나같이 150년 세계 엑스포 역사상 최고기록이다.
지난 5월1일 개장한 연 상하이 엑스포에는 외국인 참관객만해도 당초 예상인원 500만명을 훌쩍 뛰어넘은 700만명에 달했다. 이로써 중화민족만의 ‘경제 올림픽’이 되리라는 우려도 말끔히 씻어버렸다. 상하이 엑스포는 2008년 8월 열렸던 베이징올림픽과 2009년 10월1일 건국 60주년 기념식에 이은 후진타오(胡錦濤)정부의 야심작으로, 60억 지구촌 가족들을 향해 경제대국의 굴기(屈起)를 선언한 중화경제 올림픽이다.
‘Better City, Better Life(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란 엑스포의 주제에 걸맞게 상하이의 변모는 눈이 부실 정도다. 런던과 파리는 물론 동아시아 최대 경제도시인 일본의 도쿄를 넘어설 기세다. 2009년말 현재 상하이의 인구는 1912만명, 전체면적은 7037km2로, 서울시 인구(1046만명)의 약 2배, 면적(605km2)의 11배를 넘는다.
상하이는 도시규모만 아니라 도시 인프라에서도 욱일승천(旭日昇天)의 형세다. 지난 1993년에 개통된 상하이 지하철의 총연장은 420km다. 20년 앞서 1974년 운행을 시작한 서울지하철의 총연장인 340km를 넘어섰다. 상하이는 오는 2020년까지 모두 20개노선, 810km로 늘려 지하철의 수송분담률을 51%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상하이는 지난해 홍콩을 제치고 중국 제1의 경제도시로 등극했다. 지난해 상하이의 지역내 총생산(GRP)는 1조4900억위안으로 홍콩의 1조4300위안을 눌렀다. 위정셩(兪正聲) 상하이시위 서기는 엑스포 개막전에 이미 “엑스포를 계기로 상하이는 중국 최고의 국제교역도시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상하이 도약의 상징은 황푸(黃浦)강. 엑스포 대회장도 이 강의 동서로 나뉜 푸동(浦東)과 푸시(浦西)일대에 펼쳐져 있다. 지난 22일 저녁 9시. 푸동과 푸시를 잇는 난푸(南浦)대교와 루푸(盧浦)대교에는 크고 작은 차량들이 줄을 잇고 있다. 밤의 상하이는 양귀비의 화려함을 무색케 한다. 위안화의 위상만큼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에선 밤마다 찬란한 빛의 축제가 열렸다.
높이 492m, 101층규모의 세계금융센터 건물 아래로 높이 420m, 88층의 진마오(金茂)타워와 상하이 시민의 자존심인 동방명주(東方明珠)탑도 형형색색의 빛으로 자태를 뽐낸다. 멀리 싯누런 황금색 황푸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일찍이 세계국가를 지향했던 당(唐)의 ‘황금색 문화’가 떠올랐다.
상하이 엑스포는 황푸강의 기적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3년 대전엑스포가 한강의 기적을 선언한 것처럼. 1964년 도쿄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의 순환마냥 동아시아의 경제에너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중국으로 흐르는 형국이다. 선진국 일본과 G2 중국 사이에 위치한 한국. 동아시아 최대 경제도시의 자리를 놓고 각축하는 도쿄와 상하이 틈새의 서울. 상하이 엑스포의 밤 속에서 한국과 서울의 미래를 견주어 보았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쉼 없이 흐르는 싯누런 황토물결의 황푸강은 영욕의 상하이 100년을 목격해 왔다. 앞으로 황푸강이 함께할 상하이 100년의 미래를 엑스포 대회장이 보여주는 듯 했다.
세월의 시계를 한중수교가 이뤄진 1992년 11월말로 되돌려 보자. 18년전 황푸강 양안인 푸동과 푸시는 1970년대 서울의 강남(江南)처럼 모든게 어설픈 신개발지였다. 청나라말의 실력자 리홍장(李鴻章)이 세운 강남(江南)조선소가 있던 루푸대교 아래는 쇠 깎는 소리와 망치소리가 끊이질 않았던 이른바 ‘불량 주거지역’이었다.
당시 개인 직영 포장마차인 거티후(個體戶)를 운영하던 30대중반의 장바이탄(姜伯淡)씨는 “상하이 시민들에게는 이제 막 시장경제의 씨앗이 뿌려진 상태”라며 자신도 이제 돈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라고 했다.
상하이대학 상학원(商學阮) 부원장으로 재직중이던 궈싱화(郭興華)교수는 중국경제를 용(龍)에 비유해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4800km의 양쯔(楊子)강을 상서로운 용이라고 여긴다. 황푸강 양안의 푸동과 푸시를 비롯한 상하이가 용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제 막 용의 머리가 시장경제에 눈뜨기 시작한 만큼 경제발전의 열기가 강을 따라 무시무시한 용틀임을 할 것이다. 그 쯤이면 환황해 경제권은 물론 태평양 경제권에까지 중화대룡(中華大龍)의 기세가 미치게 된다.”
당시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만난 한국경제인들의 진단을 되살려보면 섬뜩해진다. “한국인 상당수가 중국을 한국에 미꾸라지나 이쑤시개를 파는 나라 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인공위성 발사를 외국으로부터 주문받는 과학선진국이다. 상하이 푸동개발지구에는 60개 대학의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모인 중국 최대의 하이테크 집합체가 들어서 있다. 거대국가임에도 공산당과 지방정부가 거시경제 조정능력을 갖추고 있다.” (김동진 당시 포항제철(현 포스코) 북경사무소장)
“외국자본을 들여오는 전략도 내심 심대한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19세기말 외세발흥의 폐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공업 역시 3대3소(대형차공장 3개, 소형차공장 3개)전략에 따라 계획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다만 1993년 9월 GATT(관세 및 무역 일반협정) 가입시 야기될 외국승용차의 진출러시를 막는다는 차원에서만 외자도입을 검토하고 있을 정도다. 외국 비즈니스맨의 입장에선 불만이지만 국가의 장기이익을 고려하는 심대한 포석임에 틀림없다.” (송훈천 당시 현대자동차 북경사무소장)
일본자본이 투자된 상하이 무역센타의 세다 미쓰오(瀬田三雄)대표는 “중국의 경제전문가들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발전전략을 철저하게 연구, 시행착오를 줄여나가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30년 중국을 연구해 왔지만 아직도 중국투자에는 신중할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1992년 당시 전세계의 중국전문가들은 중국위기론을 설파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사후 중국이 공산당의 리더십 부재와 빈부갈등, 민족갈등으로 분열되리라는 중국붕괴에 따른 세계 위기론. 하지만 중국은 세계경제 전문가들을 조롱하듯 욱일승천의 기세로 지난 18년을 달려왔다.
문득 전설속에서 옥구슬을 입에 물고있는 중화대룡의 옥구슬이 바로 동방명주탑이란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 용은 18년만에 황해경제권을 떠나 오대양(五大洋), 육대주(六大洲)를 웅비하는 G2 국가로 올라섰다. 때마침 세계역사의 시계추는 1백년 주기로 서양과 동양을 오간다는 영국시인 T. S. 엘리어트의 예언이 화제다.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7세기 수(隋), 당과 14세기 명(明)에 이어 21세기 중화인민공화국이 700년 주기의 중화민족 발흥을 이끌 것이란 진단도 유행이다. 지난 22일 경주에서 개막한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회의에 참석한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과 담소하는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인민은행 총재의 안면에는 여유로움이 흐른다. 위안화의 파워를 시사하는 듯하다. 셰쉬런(謝旭人) 중국 재무부장(장관)은 아예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양자회동 요청에도 소극적이다. 저우샤오촨 총재의 잔잔한 미소 너머로 상하이 세계금융센터 옆에 높이 632m-127층 규모로 세워지고 있는 상하이센터의 위용이 떠올랐다.
이제 한국은 미국의 군사외교동맹과 경제유대, 일본의 과학기술력에 이어 중국의 경제발흥까지도 21세기 국가명운의 주요변수로 심산(心算)해야하는 세계 환율전쟁의 들판에 들어서고 있다. 100년전 열강의 심산에 희생된 대한제국처럼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지만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언론,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바짝바짝 긴장해야 하는 형국이다. 상하이 엑스포는 중국인들에겐 황푸강의 기적이지만, 우리에겐 중국경제의 기침까지도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시그널인 셈이다.
상하이 엑스포 특별취재단=인문자 대표기자, 이필주 베이징지국장, 박미선ㆍ이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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