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사람에게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운동은 그런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나 자신을 초월할 수 있도록 하죠. 또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용감하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전 세계적으로 리닝(李寧)만큼 성공한 스포츠스타 출신 기업가가 또 있을까.
꿈에서조차 운동 생각뿐인 리닝은 1963년 중국 광시(廣西)에서 태어났다.
1971년 여덟살이 되던 해 광시 장족(壯族)자치구 체조팀에 입단하며 그의 체조인생이 시작됐고 그로부터 9년 뒤, 중국 국가대표 체조팀에 합류한다.
‘천재’, ‘신동’, ‘체조계의 작은 거인’, ‘중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그는 올림픽 등 국제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종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1982년 제 6회 체조 세계 선수권대회에서는 총 7개의 매달 중 6개를 획득하며 세계적인 ‘체조황제’로 등극했다.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는 금 3개, 은 2개, 동 1개를 차지하기도 했다. 중국 전체 메달수의 5분의 1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후 87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올림픽 조직위원회 선수위원으로 선정된 리닝은 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선수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리닝의 스포츠 인생은 관련 사업으로 이어졌다. 1990년, 그는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딴 스포츠 용품 전문 기업(브랜드) ‘리닝’을 세워 국제 스포츠 시장에 화려하게 컴백한다.
운동선수 출신인 그는 선수들이 착용하는 신발, 복장, 장비들이 경기 성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철저한 연구를 통한 ‘전문 맞춤형’ 용품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국가대표의 가슴과 등에서 그의 로고가 빛을 발했다. 해외 브랜드 유니폼을 입고 뛰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었다.
98년, 리닝은 본토 기업 최초로 의류 및 신발 R&D 센터를 만들고 중국 자주 브랜드 품질 향상에 힘을 쏟는다.
2004년에는 홍콩 최고의 명문대 중원(中文)대학교인체운동과학과와 제휴하여 자사에서 생산한 운동화의 역학 특성에 대한 테스트를 실시했다.
동시에 전문 선수들의 ‘발 모양’ 등 정보를 담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맞춤형 신발을 제작, 전문성과 착용감을 개선했다.
‘경영인’ 리닝은 제품 품질만큼이나 자사 상품 홍보를 통한 브랜드 이미지 제고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었다.
리닝은 서양의 대형 브랜드가 독식하고 있던 국제 스포츠 업계에서 리닝을 알리기 위해 창립초기부터 중국 올림픽 위원회와 손을 잡고 국제 대회 및 미국의 NBA와 같은 다수의 유명 해외팀과 스폰서십을 체결했다. 샤킬오닐 등 세계 최고 스타들과도 전속 계약을 맺었다.
리닝은 2010년 브랜드 가치 142억 5200만위안(한화 약 2조 3350억원)으로 월드브랜드평가실(World Brand Value Lab)에 의해 중국 500대 브랜드 중 50위를 차지했으며, 현재 굴지의 나이키를 제치고 중국 네티즌이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1위를 기록했다.
“중국 스포츠 사업 발전을 촉진하고 운동을 통해 우리의 생활이 바뀔 수 있도록 앞장설 것입니다.”
체조영웅에서 유명 기업가로 성공리에 변신한 리닝 회장의 경영 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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