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18 안후이성편> 2-1 소요진전투의 영웅과 조조의 교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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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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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홍해연기자) 삼국유적공원을 나선 취재팀은 삼국시대 또 다른 장수를 탄생시킨 소요진 전투의 현장으로 향했다.

삼국시대 허페이는 강남과 중원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강남을 평정해야 하는 조조나 북방 할거를 꿈꾸는 손권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다. 동시에 허페이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담수 자원을 가지고 있어 농경생활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때문에 당시 창장(長江)과 화이허(淮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조조와 손권은 허페이를 차지하기 위해 자주 전쟁을 치뤘다. ‘일진일퇴(一進一退)’하던 허페이 쟁탈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흥미진진했던 싸움은 바로 ‘소요진(逍遙津)’ 전투.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소요진은 본래 허페이의 강나루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속에서 강줄기가 변하며 지금은 호수를 품은 ‘소요진 공원’이 되었다. 1800여년 전, 전쟁의 불길과 날아드는 화살로 가득했을 전장을 이제 놀이공원과 나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메우고 있었다.

215년, 북방 패권을 장악한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치기 위해 병력을 정비한다. 한중 토벌에 모든 병력을 동원하면서 조조는 다만 장료에게 7000명의 군대를 맡기며 허페이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조조가 한중으로 떠나자 손권은 기다렸다는 듯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의 경계를 넘어 파죽지세로 환성을 함락하고 여세를 몰아 허페이를 공격했다. 허페이는 순식간에 위기에 빠졌다.

“나와 악진은 돌격대를 이끌고 손권과 정면으로 승부하며 소요진(逍遙津)으로 적군을 유인하겠소. 이진은 따로 군대를 이끌고 소요진에 매복해 있다가 오군이 다다랐을 때 다리를 끊으시오.” 장료는 곧 이진과 악진을 불러들여 작전을 세웠다.

수하에 있는 7000명의 병사 중 800명의 돌격대를 꾸려 선두에 선 장료는 맹렬한 기세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번개 같은 칼날에 수십 명의 목이 댕강 베어졌고 장료는 순식간에 손권이 있는 본진까지 이르렀다.

선봉대를 보내고 진영에 남아 승리를 확신했던 손권은 장료의 반격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의 급격한 반전에 목숨을 부지하기 바빴던 손권은 300명 남짓한 근위병의 비호를 받으며 적진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장료에 쫓기며 있는 힘을 다해 소요진에 다다랐지만 있어야 할 다리는 이미 매복해 있던 이진에 의해 끊어져 후였다. 숨통을 조여오는 급박한 순간, 손권은 남은 군대에 뒤를 부탁하고 말 고삐를 잡아당기며 끊어진 ‘비기교(飛騎橋)’를 뛰어넘었다.

비록 손권은 놓쳤지만 기지를 발휘해 10배가 넘는 대군을 격퇴한 공로로 장료는 정동(征東)장군에 임명되고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과거 강나루였던 소요진은 현재 공원으로 변해있었다.


고소요진 공원 입구에는 장료의 동상이 서 있다.


소요진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중앙에 놓인 장료의 동상이 확 눈낄을 끈다. 두터운 투구와 갑옷, 허리에 비켜찬 칼, 말 고삐를 굳게 잡은 두손. 고함소리를 내며 전장을 누비는 맹장, 장료의 위용이 그대로 느껴진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원을 가로질러 안 쪽으로 향했다. 어느 덧 장료의 묘라고 전해지는 '의관총(衣冠冢)'을 가리키는 안내판이 보였다. 아담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길 양옆으로 무덤을 지키는 동물상이 늘어서 있었다. 계단을 딛고 비각에 오르니 우거진 측백 나무사이로 의관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관총으로 향하는 계단.


의관총 앞 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의 모습.


장료가 사용하던 갑옷과 투구가 묻혀있다는 의관총.


삼국시대 허페이 최고의 영웅 장료가 사용한 갑옷과 투구가 묻혀있다는 흙 무덤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했지만 상쾌한 공기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무덤 속 주인공을 위로해주는 듯 했다.

옛 전장터에 공원을 조성하고 ‘고소요진 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공원 입구에 장료의 동상을 세워둔 것도 모두 장료를 기억하는 후대의 마음이리라.

의관총 옆에는 삼국시대 역사와 관련 유물을 전시해 놓은 삼국역사문화관이 있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돌을 투척하던 삼국시대의 발석차(發石車)


의관총 옆에는 허페이에서 발굴된 유물과 삼국시대 역사를 정리해 놓은 ‘삼국역사문화관’이 있다. 안후이를 비롯한 중국 전역에서 가장 먼저 생긴 삼국시대 전문 전시관이라고 공원 관계자가 설명해 주었다.

▲ 조조의 석궁 지휘대 ‘교노대’
소요진 공원을 둘러본 뒤 우리 취재팀은 교노대(喬弩臺)로 발길을 옮겼다. 교노대는 조조가 허페이에서 병력을 정비하고 친히 석궁과 궁술을 가르치던 장소다.

소요진 공원 정문을 나서 지하도를 건너 5분 정도 걸어가니 백화점과 유명 브랜드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심에 취재진이 찾던 교노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조가 병사에게 궁술을 가르치던 교노대 터위에 지어진 명교사.


취재진에게는 반가운 한국 가요가 울려 퍼지고 외국어로 쓰인 간판이 빼곡한 현대의 거리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조가 궁술을 가르쳤던 곳이라는 설명에 삼국유적공원에서 보았던 지휘대와 넓은 공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천하삼분(天下三分)’의 시대가 끝이 난 뒤 수 천명의 군사를 지휘하던 조조의 교노대는 터만 남게 되었고 그 터 위로 사찰이 들어섰다.

첫 번째 사찰인 ‘철불사(鐵佛寺)’는 남북조시대 (502~549)에 지어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소실됐다. 그리고 200여 년이 흘러 당(唐)대에 지금의 ‘명교사(明敎寺)’가 세워졌다. 명교사 때문인지 교노대는 명교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절 안을 살펴보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입구 문턱을 넘기도 전부터 진한 향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잠시 기다리니 주지스님이 나와 우리 를 데리고 절안으로 들어갔다.

방석까지 들고 와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자리를 잡은 노인들로 절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불심으로 절을 찾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마실을 나온 듯 가벼운 차림에 유유자적한 모습이었다. .

명교사 내부의 모습.


조조의 병사가 식수로 사용했다던 우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인들을 비집고 스님은 취재진을 대웅전 옆의 작은 정자로 안내했다. 정자 가운데는 놀랍게도 우물이 있었다. “‘옥상정(屋上井)’입니다. 우물 입구가 당시 주변 집들의 지붕보다 높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스님이 설명했다.

268년, 조조 군사의 식수로 사용되던 우물로 물 맛이 좋았을 뿐 아니라 1년 4계절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우물 입구 주변에 남은 물을 끓어 올릴 때 생겼었을 법한 줄 자국이 세월의 흐름을 설명해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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