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단처가 있는 곳은 면현 고조향(高朝鄕) 구주포(舊州鋪)라는 마을이다. 예전 면양의 행정관청이 있던 곳으로, 한때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이곳은 지금 매우 한갓진 분위기로 변모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노년층 만이 남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안내원이 귀뜸했다.
한중왕이 된 유비가 설단처에 올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천하를 호령했을 기개도, 그를 따르던 장수들의 요란한 말발굽 소리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마을은 많이 쇄락해 있었고 당시 번화했을 거리는 지금 대부분 농토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화려했을 옛 영화는 아무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차량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흙먼지 날리는 좁은 도로안에 야트막한 담장으로 둘러처진 설단처가 눈에 들어온다.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잠겨 있어 일행은 밖에서 한참 서서 열쇠를 갖고 있다는 마을 사람을 기다렸다.
밖에 서서 야트마한 담장 사이로 솟아있는 기념탑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중왕에 오른 감회에 벅차 올랐을 유비가 떠오른다. 한나라를 다시 세워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자욱한 안개속에서도 빛났으리라.
서기 217년. 유비는 익주가 안정되자 법정의 제안을 받아 한중을 공격했다. 한중전쟁은 유비와 조조가 직접 군을 거느리고 벌인 전투다. 조조는 한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아는 만큼 직접 출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조조에게 불리했다.
정군산에 주둔한 한중의 총사령관인 하후연이 촉의 노장인 황충의 급습에 죽고, 온몸이 담덩어리라는 조자룡의 뛰어난 무공에 압도돼 조조군은 열세에 몰린다.
219년 5월. 조조는 결국 한중을 포기하고 퇴각을 결심한다. 한중을 차지한 유비는 군신들에 의해 한중왕(漢中王)으로 추대됐다.
망설이던 유비는 공명의 설득에 한중왕에 오른다. 문무관헌들의 배하(拜賀)를 받으며 왕에 오른 유비는 교차하는 만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유비 나이 59세였다. 35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며 얻은 영광이었다.
한중은 유비가 왕에 오르는 데 있어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한중은 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곳이다. 이제 유비는 그 한중에서 무너진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른바 한정통론이다.
잠시 후 마을의 한 촌로(村老)가 열쇠를 들고와 문을 열어줬다. 여든이 다 된 이 촌로는 20년 가까이 열쇠를 관리해 오고 있다고 한다. 한중왕설단처는 마을에서 자치회 성격의 모임을 만들어 마을사람들이 직접 청소하고 관리해 나가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힘들만큼 설단처는 작고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 있던 자리도 이 곳이 아닌 마을 논밭 한 가운데였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 설단처 유적지가 발견됐을 당시는 중국 전반적으로 유적에 대한 깊은 인식을 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경작이 되고 있어서 장소를 이곳으로 옮겨 기념관 형태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유비는 이곳에 사방 9리의 단을 쌓고 성대하게 즉위식을 거행했다. ‘당시의 화려함이 얼마나 보존되어 있을까’ 생각하며 설단처를 찾았다.
설단처 한 가운데는 약 2미터 높이의 비석이 보인다. 예서체로 ‘선주초위한중왕설단처’(先主初爲漢中王設壇處)라고 써 있다. 청나라 때인 광서 29년(1903)년에 세운 것으로 1984년 제갈량 학술회 당시 설단처 복원이 결정되면서 마을 논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안쪽에는 오호장군(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의 조각상이 차례대로 만들어져 진열돼 있다. 또 그들을 기리는 기념비도 한쪽에 세워져 있다. 모두 마을 사람들이 직접 글을 쓰고 제작했다고 한다.
설단처를 둘러본 취재진 일행은 차량으로 약 5분을 더 가 지나가던 길에 정자 하나를 발견하고 잠시 정차했다. 자세히 가서 보니 ‘한제갈무후제목우류마처’(漢諸葛武候製木牛流馬處)라고 써 있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목우와 류마를 만들던 장소라고 한다.
목우유마(木牛流馬)란 제갈공명이 발명한 기계로 소나 말 대신에 군량을 실어 날랐다는 수레다. 전장에서 굉장한 활약을 하는 통에 적장 사마의는 보통 골치가 아프지 않았다. 고심하던 사마의는 자신도 목우유마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매복하고 있다가 5~6마리의 목우유마를 탈취해 진영으로 돌아온 뒤 기술자를 불러 똑같이 모방했고 생각했던 대로 목우유마를 이용해 군량과 병장기를 전장에 공급했다. 짝퉁 목우유마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 사실이 공명에게 보고되자 공명은 오히려 껄껄 웃으며‘우리는 몇 마리의 목우유마를 잃었지만 이 일로 인해 조만간 허다한 군량미와 병장기를 얻을 것을 것이니 걱정 없다.’며 목우유마를 적에게 빼앗긴 죄를 청한 부하 장수를 안심시켰다.
그 후로 얼마 뒤 사마의가 목우유마를 이용해 군량미를 운반한다는 보고를 받은 공명은 장수를 불러 사마의 군으로 분장한 다음 함께 군량미를 운반하는 대열에 섞여 적당한 지점에서 적병을 기습, 죽인 뒤 목우유마의 혀를 비틀어 놓고 도망쳐 나오게 한다.
사마의의 본진이 도착해 움직이지 않는 목우유마를 아무리 동작시켜 보려 했지만 허사였고 공명이 보낸 대군이 몰려오자 사마의와 군사는 목우유마와 수많은 군량을 두고 도망을 쳤다. 공명은 군사들에게 목우유마의 혀를 다시 정상으로 비트니 목우유마는 공명의 진영으로 나는 듯 달려 왔고 어마어마한 양의 군량을 쉽게 구했다는 것이다.
촉한 건흥 9년(231년, 유선 9년) 2월 제갈량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기산으로 나가 조위국(위나라)이 있는 북부를 쳤는데 군사가 많아 식량 수요가 많아지자 목우(木牛)를 만들어 식량을 운반했다. 그러나 6월에 식량이 떨어지자 하는 수 없이 퇴군했다. 3년 동안의 준비를 거쳐 건흥 12년(234년, 유선 12년) 2월, 제갈량은 10만이 넘는 대군을 직접 거느리고 야곡으로 나가 위국을 다시 쳤는데 ‘유마(流馬)로 군사 물자를 공급했다.
현재의 목우류마처는 1984년 같은 시기 제갈량을 기념하며 정자와 기념비를 새로 세운 것인데, 비석 앞에는 누군가 피워놓고 간 향초가 아직도 모락모락 연기를 뿜으며 타고 있다.
현지에서 만난 산시(陝西)성박물관 학회회원 서용화(徐勇華·60)씨는 “한중 사람들에게 유비와 제갈량은 아직도 마음 속 깊이 모시고 있는 신적인 존재와도 같다”며 “특히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한정통론을 뿌리깊이 의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제갈량을 도와 목우와 류마를 만들었다는 이곳은 황사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곳이라고 한다. 정자 주변은 나무가 빽빽히 심어져 있는데 이는 한중 여기저기를 가다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비슷한 광경이다.
모두 유물·유적이 발견된 장소로 아직 발굴작업을 하지 못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나무로 임시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광활한 땅,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이지만 발굴작업을 하기에는 인력과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앞으로 해결할 과제가 많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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