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영드래건스 구장에서 시구하는 날을 꿈꾸며…" 홈런왕 김봉연 극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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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1-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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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시절 김봉연(사진=극동대 제공)
아주경제 박초롱 기자=최근 야구계에서는 누가 프로야구 제10구단의 주인공이 되느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결국 전북-부영은 고배를 마셨지만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안팎으로 나돌던 수원-KT를 상대로 끝까지 팽팽한 승부를 겨뤘다. 

그 때문에 10구단 선정을 위해 외부 평가위원회가 조직되는가 하면 2008년 이후 5년 만에 신규 구단 창단을 승인하기 위한 야구협회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치열한 창단 경쟁 현장의 중심에 극동대학교 사회체육학교 김봉연 교수가 있었다.

■ 김봉연 교수? 해태타이거즈 홈런왕 김봉연!

아직 많은 이들이 ‘김봉연 교수’라는 직함보다 ‘해태타이거즈’(현 기아타이거즈) ‘홈런왕 김봉연’이란 호칭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지만 김봉연 교수가 야구 선수 시절 보여 준 활약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는 지난 1982년과 1986년 해태타이거즈 홈런왕으로 활약하며 해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특유의 강타로 4번 타자를 독점했던 김 교수는 김준환, 김준환, 김종모와 함께 해태타이거즈의 ‘KKK포’ 타선을 완성한 주역이기도 하다.

또 선수 시절 4차례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타격 3관왕,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상 MVP 등 각종 기록을 쏟아냈다.

■ 군산상고의 ‘역전의 명수’
해태 타이거즈 시절 김봉연(사진=극동대 제공)
1972년 3월 19일, 창단 3년 차의 군상상고 야구부가 전국 야구를 제패했다.

9회 말 부산고에 1:4로 뒤진 상황에서 5:4로 상황을 뒤집은 짜릿한 역전승이었다.

당시 4점을 연달아 내 팀의 승리를 이끈 김 교수는 “그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로 활약한 김 교수는 연세대에서 1974년 대학리그 홈런왕을 거머쥐었고 졸업 후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의 최고 거포로 우뚝 선다.

또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승리를 이끌고 아시아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1982년 31세의 나이로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서는 맞수 이만수를 제치고 82년 홈런왕 자리에 올랐다.

뛰어난 활약만큼 해프닝도 많다.

82년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에서 투수가 일부러 빈볼을 던졌다며 배트를 들고 달려나가 투수를 줄행랑치게 하고 90년 코치 시절에는 심판의 뺨을 때려 30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다.

이는 KBO 역사상 최다 출장 정지 기록이다.


■ 교통사고로 300 바늘 꿰매고도 그라운드에 올라 MVP 차지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김 교수도 1983년 교통사고를 당하며 선수 생활의 큰 위기를 겪었다.

이 사고로 동승자는 사망했고 김 교수 역시 300바늘을 넘게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주변에서는 ‘선수생활이 끝났다’고도 했지만 교통사고 후 변한 것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기른 수염뿐이었다.

사고 한 달 만에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김 교수는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며 실력이 건재함을 드러냈다.

‘콧수염 타자’라는 별명도 이때 팬들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 홈런왕에서 골프 해설가로
1988년 늦은 나이까지 현역에서 뛴 김 교수는 37세에 아름다운 은퇴를 선택했다. 

그리고 김 교수는 자신의 야구 재능을 골프에 접목했다.

현역 시절 김 교수는 교과서 스윙이라고 불리는 ‘다운스윙’ 대신 골프의 타격 자세와 유사한 ‘어퍼스윙’으로 곧잘 홈런을 때렸다.

그 덕분인지 김봉연 교수는 드라이버샷 250m는 거뜬히 쳐낼 정도로 골프도 수준급이다.

“첫 필드에서 장타를 날리니 같이 치던 사람들이 (골프) 몇 년 쳤느냐 묻더라고요. 타자 출신이라 도움이 많이 됐어요.”라고 말한 그는 한때 위성방송 골프전문 채널에서 골프해설가로 변신, 골프팬들과 소통했다.


■ 김봉연,  전북 부영 드래건스 구장에서 시구를 꿈꾸다
‘homerun’이란 이메일 주소에서부터 야구 사랑이 넘치는 김봉연 교수에게 전북은 한국 고교 야구의 시작점이자 한국 초기 프로야구를 이끌었던 선수들의 요람이다. 

그는 이번 ‘프로야구 10구단 전북 창단 도우미’로 나섰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다.

결과에 대해 김 교수는 “현재 프로야구는 수도권 4개 팀과 비수도권 5개 팀이 있다. 또다시 한 팀이 수도권에 배정돼서 수도권에만 야구팀 절반이 몰리게 됐다. 대한민국 프로야구라기보다는 수도권리그, 수도권 야구에 그친다”며 “장기적인 야구 발전에서 보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KT 연 매출은 28조, 부영은 2조 6,000억이다. 인구 또한 경기도는 1200만이지만 전북은 고작 180만이다. 처음부터 승산이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면서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혹자는 들러리만 섰다고 말하지만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짧은 기간 홍보가 많이 됐다. 초중고 야구팀은 부영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전북의 야구 사랑을 알리고 인프라를 확대 구축하는 효과도 봤다.”라고 덧붙였다.
 
10구단 유치 좌절이 마지막이 아니라, 전북 야구 발전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 교수는 “전북 부영 드래건스 구장에서 시구하는 날을 꿈꾼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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