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킨스는 볼티모어에 그의 이름을 딴 사립 명문 존스 홉킨스대학을 세운 사람이다. 그는 홉킨스대학 설립을 위해 당시 총 1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 금액은 당시 미국 GNP(국민총생산)의 약 95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므로, 현재 미국 GNP 16조 달러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7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 전 홉킨스 집안은 1807년 집안 노예를 모두 해방한 선구자였다. 자율적으로 남은 흑인 노동력으로는 농장을 꾸려가지 못해 홉킨스를 비롯한 어린 형제들과 가족들이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던 홉킨스는 1812년 17세 나이에 농장을 떠나 삼촌이 운영하던 제럴드 홉킨스 볼티모어 도매 식료잡화점 비즈니스에 뛰어든다.
각종 잡화, 옥수수 위스키 등을 판매하며 사업 감각을 익힌 그는 1847년 볼티모어와 오하이오를 연결한 철도회사 ‘B&O’에 투자하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됐다. 그는 이 회사의 디렉터(지금의 부장 또는 이사 정도)와 재무위원회 의장 등의 직함을 맡았다. 그는 또한 ‘머천트 은행’의 대표도 맡았고 여러 다른 조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평생 모은 돈은 ‘미국 현대사 갑부 100명’ 리스트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빌 게이츠 등에 이어 69위를 차지할 정도다.
정치에 깊게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홉킨스는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을 지지했고, 당시 그의 주변 많은 메릴랜드 인사들이 남군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친 등 그의 선조가 일찍이 노예를 해방한 영향을 받아 그는 인권과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진보주의 성향이 강했다. 유유상종이라고 그의 ‘절친’ 조지 피바디는 1857년 볼티모어에 피바디 대학을 만들었고, 먼 훗날인 1970년대 홉킨스가 설립한 존스 홉킨스대학교와 피바디 음대 등 대학 조직이 통합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어려서 겪은 미영전쟁과 중년에 겪은 남북전쟁은 홉킨스로 하여금 의료시설과 의료인을 확충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깨닫게 했다. 그는 죽기 3년 전인 1870년 B&O 주식 700만 달러 등으로 무료 병원과 의사·간호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 설립 계획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존스 홉킨스대학교로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
설립 초기 무료 병원을 구상하며 어려운 학생이나 고아들이 혜택받기를 원했던 홉킨스의 뜻은 지금도 내려와 존스 홉킨스 대학은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에게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홉킨스 병원과 의대는 지금 미국에서도 하버드와 1,2위를 다투는 최고의 의료진을 자랑하고 있다. 한 사람의 뜻깊은 행동이 150년이 지난 지금 더욱 빛을 보고 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홉킨스의 뜻을 이어받아 지난주 말 이 대학에 3억5000만 달러를 기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64년 존스 홉킨스대학 공대를 졸업한 블룸버그 시장이 지금까지 학교에 기부한 돈은 이로써 10억 달러가 넘게 됐다. 한 개인이 한 대학에 기부한 돈이 10억 달러가 넘는 진기록도 세우게 됐다. 자산이 500억 달러나 되는 빌 게이츠의 빌앤미란다 재단이 지난해 10억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을 여러 대학에 기부했다. 블룸버그 시장은 개인 자산만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대학 기부 기록도 세우게 됐다.
그의 기부금으로 대학은 전공 간 연계 연구, 각 단과대학에서 교수 50명 신규 임용, 학생들 장학금 지급 등을 할 예정이다. 연구 분야엔 수자원 지속성, 개별화된 의료보건 서비스, 글로벌 건강, 도시 재활 과학 등이 포함됐다.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후인 1965년 단돈 5 달러의 기부로 선행을 시작한 블룸버그 시장의 말은 그가 기부한 3억5000만 달러보다도 더 빛난다. “기부나 선행은 남의 삶을 바꿀 때만 의미가 있다.”
세계 경제 위기가 지속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엷어지고 있고 삶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투쟁과 같은 나날을 보내는 요즘, 150년 전 상인 존스 홉킨스와 지금의 블룸버그 시장은 우리에게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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