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2월15일 동양맥주 사장 이취임식에서 정수창 사장(왼쪽)과 박두병 회장이 연설을 하고 있다. |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지도력, 즉 리더십은 부하를 거느렸을 때에 구사하기는 쉬어도, 상대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발휘하기 어렵다.
경제단체장이 갖춰야 할 최선의 덕목 중 하나는 바로 리더들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 중에 리더가 되려면 높은 도덕성과 더불어 그들을 껴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이해력, 더불어 옳은 일을 옳다고 이해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모두 묶어 ‘소통’이라고 표현해 보겠다.
박용만 회장은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일반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소통의 대명사로 통한다. 물론 그의 명성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쌓아올려진 것은 아니다. 두산그룹은 오너 형제들의 집단경영 체제를 통해 그룹의 주요 일정을 대화를 통해 결정내리고, 이는 다시 각 계열사에 포진한 전문 경영인들과 대화를 하며 해결책을 찾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박용만 회장이 상의 회장으로서 조기 안착 여부는 이같은 대화경영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는 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사람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과 옳다고 여기는 일은 반드시 이해를 구해내고야 마는 박두병 회장의 리더십에서 그 해답을 찾아 봄직 하다.
박두병 회장은 상의가 “우리나라 유일의 법정단체임”을 역설하며 상의가 모든 경제단체의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당연히 전경련과 무역협회 등 타 경제단체에서는 박두병 회장의 공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불화의 불씨를 만든 박두병 회장. 하지만 그 불화를 화해의 분위기로 전환시킨 사람 역시 그였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방법, 바로 대화를 통해서였다. 어떤 ‘이슈’가 생기면 박두병 회장은 의견 교환을 통해 일치점을 찾기를 바랐으며 그렇게 실행했다. 또한 박두병 회장은 자주 경제단체 대표들과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주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종 공명정대한 판단과 설득으로 여려 의견을 통일시켜 일치점에 접근토록 했다. 그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경제단체간 갈등은 눈 녹듯 사라졌다.
당시 박두병 회장과 인연을 맺었던 이활 무역협회 회장은 그에 대해 “의견이 백출하는 경제인 회의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계 발전에 지대한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의견 충돌 사태가 벌어질 때면 ‘연강이 이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이렇게 갈팡질팡하지는 않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 그가 그리워진다”고 회상했다.
박두병 회장의 소신과 신념이 빛을 발한 또 다른 사례는 ‘산업합리화’운동이다. 1967년 7월 정부는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의 실시로 개발경제체제로의 개편을 단행하고, 국내상품 가격의 국제평준화를 시도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조치를 내렸다. 산업합리화는 상의 주도로 경제계가 경쟁력 강화를 이뤄내자고 실시한 범국가적 운동이었다.
기존 사업 관행에 길들여져 있던 기업들의 반발도 컸지만 산업합리화를 기업합리화에만 초점을 두는 것도 문제였다. 박두병 회장은 기업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킬게 아니라 정부도 행정의 근대화를 이루고, 국민도 소비생활의 합리화를 이뤄나감으로써 사회경제의 합리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해 그 뜻을 관철시켰다.
기업합리화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박두병 회장은 대화를 넘어 직접 이를 실천했다. 1969년 12월 15일 동양맥주 사장직을 전문 경영인인 정수창 사장에게 넘기고 경영일선에서 사실상 손을 뗀 것이다. 국내 경제계에서는 처음으로 이뤄진 경영과 자본의 분리이자, 한국에서도 전문경영인 시대를 연 첫 사건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 본 많은 이들은 그를 진정한 상공인의 리더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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