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물방울 화가 김창열화백이 갤러리현대에 걸린 자신의 물방울 그림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사진=박현주기자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하얀 턱수염 사이로 말문을 열었다.
"너절하지 않은 걸로…."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 웃음을 터트리자 그는 이파리처럼 순한 웃음을 보였다.
또다시 "너절한게 뭐냐"고 묻자 "있으나 마나 한것"이라며 눈빛을 반짝였다.
"어떤 화가로 기록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을 한 이는 '물방울'로 불리는 김창열(84)화백이다.
21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김화백은 2년전보다 몸집이 좀 더 작아졌고 난청이 더 진행된 듯했다. 합장하듯 조심스럽게 물컵을 들어올린 양손은 떨림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됐다.
"올 봄 수술했는데 경과가 좋지 않아요."
김 화백 옆에 있던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의 목소리가 울컥 멈췄다. 순간 정전이 된 듯한 침묵에 눈길이 모아졌을때 눈물을 닦아내는 박회장이 말을 이었다.
"최근에 제주도에 작품을 기증했잖아요. 아드님들도 기꺼이 기증에 동참해줘서 정말 기뻤어요. 살아계실때 미술관 건립이 의미있는것 아니겠어요?. 제주도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김 화백은 지난 5월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제주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작품 200점을 기증했다. 평안남도 맹산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제주도에서 1년여간 피난 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
지난 수년간 건강이 악화해 자녀들에게 작품을 물려주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가 미술관 건립을 위해 자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후대에 물려주려 소중히 간직했던 작품을 기증했다고 한다.
'김창열 미술관'은 제주도시 저지리에 위치한 예술인 마을에 건립된다. 제주도시는 김화백 미술관을 위해 전담부서까지 배치할 정도로 적극적인 행정력을 추진, 내년 3~4월 착공식을 할 예정이다.
김창열 화백/사진=박현주기자. |
평생 500점을 그렸다는 김화백은 “내 작업의 전체, 내 인생의 전부를 다 내준 것”이라고 했다.
"작품을 기증하고 얼마나 마음이 공허하겠어요. 그래서 가을에 여는 첫 전시로 김화백의 전시를 기획한겁니다."
박명자 회장은 "이 전시가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란다"며 다시 속울음을 삼켰다.
지난해 11월 국립 타이완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을 연 바 있는 김화백은 오는 29일부터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김창열화업 50년’을 연다.
물방울 연작이 시작된 1970년대 초부터 최근작까지 모두 40여점을 선보인다. 김화백의 전성기때 그려진 70년대 80년대 일부 작품은 소장품을 빌려온 것이고 대부분 일반 대중에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백발과 기다란 흰수염에 덮인 화백은 그의 물방울처럼 고요했다. 질문이 나오면 순간 침묵이 이어졌지만 답은 명료했다. 목소리는 둥근 물방울처럼 울림이 있었다.
물방울은 가난이 준 선물이었다.
“1972년쯤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살았어요. 화장실도 없어 세수도 밖에 나가 해야 했지요. 어느 날 아침, 씻으려고 대야에 물을 담으려다 옆에 있는 캔버스위에 물방울이 튀었어요. 아, 그런데 크고 작은 물방울에 햇빛이 비쳐서 아주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우연히 만난 물방울은 '파리에 가면 물방울을 대신할 한국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로 김 화백을 빛나게 했고 그의 인생이 됐다.
갤러리현대 신관에 걸린 김창열화백의 '회귀'시리즈를 한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사진=박현주기자. |
1972년 살롱드 메에 입선한 이후 본격적인 물방울 시리즈가 탄생했다. 1980년대부터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고 80년대 중반부터는 마대에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을 채워넣어 동양적 정서를 한껏 살렸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쇄체로 또박또박 쓰인 천자문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화면 전반에 흩어진 ‘회귀’ 시리즈가 등장한후 최근 작업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작들은 90년대 이전에 비해 더 화사하고 물방울은 여유로워졌다.
물방울의 의미에 대해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물방울은 아무것도 아닌 것, 무색무취하고 뜻이 없어요."
김화백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림을 만드는 일을 평생 했죠. 화가들은 착각이 심하기 때문에 어떨 때는 그림을 그리다 영혼하고 닿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기도 한다”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물방울에 변화가 있냐는 질문에 "반복입니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평생을 물방울을 그려오며, 같은 소재로 대해 지겹지 않았느냐고 하자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고 했다.
반복의 연속, 도를 닦듯 물방울에 천착한 김화백은 세계적 화가로 위치를 굳혔다. 그동안 파리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 뉴욕, 독일, 파리,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국립대만미술관에 잇달아 초청돼 '물방울 화가'의 독보적 존재를 알렸다. 작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진짜 물방울 같은' '환상적인 완벽함' 으로 파리화단에서 먼저 주목받은 김 화백의 물방울은 시대에 따라 배경에는 변화가 있지만 영롱함과 투명성은 한결같다.
올해 만으로 84세. 물방울 집념은 여전하다. 그는 "손이 떨려서 붓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고정한 채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가 물잔을 무겁게 들어올리는걸 무심코 바라보자 "죽을때가 다 됐어요."라며 스스럼없이 말했다.
물방울을 대신한 화가는 노인이 되었지만 물방울은 여전히 탱글탱글하다.
절제와 신중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한 그 '물방울'이 말했다.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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